차라리 듣지 말았어야 할 음성파일 줄줄이 호통치고 예산 따오는 게 뭐 그리 대단한가 정치 바로 세우는 일에 작은 용기라도 내야 기본 못 지킬 바엔 특별감찰관을 국회에도
김승련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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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지와 국회 법안의 공통점은 만드는 과정을 보지 않는 게 차라리 낫다는 점이다’라는 말은 독일 정치에서 전해졌다고 한다. 요즘이라면 ‘국회 법안’ 대신에 정당공천 등 다른 표현을 넣을 수 있겠다. 가깝게는 김병기 강선우 이혜훈 사건을, 거슬러 가면 김건희 여사의 국정 사유화의 디테일을 알게 되면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비유다. 모르는 게 나았을 장면을 뉴스를 통해 알게 된 뒤 분노하는 이들이 많다.
건진법사가 2018년 어느 출마 희망자에게서 공천을 미끼로 1억 원을 받았다는 혐의가 알려졌을 땐 저잣거리 브로커의 일 정도로 여겼다. 요즘 세상에 공천받겠다고 현금을 싸 들고 나서는 것도 웃기지만, 선거로 돈을 벌겠다는 정치인은 자취를 감췄을 것으로 짐작했다. 사실 검증이 더 남아 있지만, 중앙정치 한복판에서 그런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장면이 벌어졌다. 충격적인 것은 스캔들의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훌륭한 경력을 지녔고, 세상을 향해 정의로운 말들을 자주 던져온 이들이란 점이다.
나라에서 월급 주는 보좌진 9명을 거느린 국회의원은 소왕국의 1인자다. 피감기관장에게 호통치고, 700조 원이 넘는 국민 세금의 용처를 정하는 과정에 1인당 수억∼수백억 원 정도는 예산 처분권이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정부와 기업이 잘 모시고, 예산 수혜자들은 조아린다. 특권의식이란 마(魔)에 휩싸이고, 의전의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리게 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처럼 “갑의 횡포 근절이 내가 정치하는 이유”라는 글을 책에 쓰면서도 20대 인턴을 쥐잡듯 대하는 이율배반이 그래서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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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론 안 된다, 어떻게든 바꿔 보라는 시대의 절규가 들릴 법도 하지만 정치권은 여전히 둔감하다. “환부를 도려내겠다”는 민주당 반응은 상투적이어서 안일하게까지 들린다. 국민의힘은 모처럼 여당에 악재가 터지니 어깨에서 짐을 덜어낼 때의 홀가분함을 느끼는 듯하다.
이젠 의원들에게 따져 물어야 할 때가 왔다. 예산 나눠 갖고, 보좌관이 써 준 원고를 읽어가며 호통치고, 상대 당 비판하고, 위헌 논란이 있건 없건 당론대로 국회서 표결하는 일은 뭐 그리 대단한 걸까. 이런 정도 일을 할 거면 왜 4년마다 홍역을 치르며 경선하고 총선을 치르는지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국회의원 300명 모두를 도매금으로 매도할 생각은 없지만, 이젠 정말 정치가 한 클릭이라도 개선되도록 하는 일에 국회의원이 한 기여로 그 정치인을 평가해야 한다.
여야 정치인들에게 당부하고자 한다. 여야에 각각 유황불이 떨어졌는데도, 가만히 앉아 주변 공기를 살펴선 곤란하다. 여당은 반복되는 돈과 성추문으로, 야당은 ‘윤 어게인’ 세력과의 절연 문제로 수렁에 빠져 있다. 정당문화를 바꿀 정풍(整風) 운동이라도 시작됐어야 마땅한데, 용기를 내는 의원 한둘이 안 보인다. 의원들이 너무 잘 알아서일 것이다. 고개 들고 당 핵심부를 향해 옳은 소리, 쓴소리를 외치면 다음 공천 확률은 낮아진다. 진화생물학에서 말하는 ‘자연선택’ 과정이 반복되면서 지금 여야 모두 창업가형 의원은 찾아보기 어렵고 얌전한 월급쟁이형이 수두룩하다.
정부는 지난달 국무총리실 산하에 사회대개혁위원회라는 조직을 설치했다. ‘사회의 근본 틀을 확 바꿔보겠다’는 인상을 주는 이름이다. 이 조직의 실체와 활동 내용은 논외로 하더라도 비슷한 결기가 국회든 정당에서든 등장할 때가 됐다. 정치인들은 남 탓하면서 ‘너만 바뀌면 세상이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바뀌지 않고 세상이 달라졌던 때를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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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련 논설실장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