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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임우선]교육의 의미 묻는 권도형의 편지

입력 | 2025-12-23 23:15:00

임우선 뉴욕 특파원


‘어머니는 제가 무엇에 대해 위대해져야 하는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위대함 그 자체를 원하셨습니다. 저는 명확한 목적 없이 고도로 기능적인 존재로 길러졌습니다.’

이달 11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남부연방법원에서 권도형 전 테라폼랩스 대표(34)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이날 권 씨는 수많은 거짓말과 사기적 수법으로 자신의 가상화폐 테라·루나를 홍보하고, 400억 달러(약 59조 원) 규모의 폭락 사태를 초래해 전 세계 수십만 명의 투자자에게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입힌 죄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오만과 교만 낳은 ‘독이 된’ 교육

이날 선고에 앞서 권 씨는 판사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나는 비교적 독특한 성장 과정을 거쳤다”며 “여덟 살 때 아버지가 해리포터를 읽어주면 장난감을 사주겠다고 해서 스스로 영어를 배웠고, 어머니는 내가 위대한 사람이 될 운명이라고 믿어 TV부터 컴퓨터까지 방해가 될 만한 모든 걸 제거했다”고 적었다.

그는 또 “또래 아이들이 가요를 들을 때 나는 고전 오디오북과 알렉산더, 나폴레옹의 전기를 읽었다”며 “친구들이 보드게임을 할 때 난 영재를 위한 퍼즐을 받았는데 어머니가 대체 그런 걸 어디서 구했는지는 신만이 알 것”이라고 자조했다. 이어 “대입 때 옥스퍼드대와 스탠퍼드대 등 여러 학교에 합격했지만 하버드대엔 합격하지 못했다”며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방을 나갔다”고도 적었다.

그의 말마따나 그는 학창 시절부터 ‘기능적으로 매우 우수’했다. 지금보다 외국어고의 선호도가 훨씬 높던 시절에 외고 중 가장 치열하다는 평가를 받는 대원외고에 입학했다. 또 재학 중 승승장구한 영어토론대회 수상 실적을 바탕으로 스탠퍼드대에 진학했다. 이 스토리로 책도 냈는데, 당시 교육계에서 이 같은 출판은 일종의 ‘스펙 차별화 전략’으로 통했다. 부모가 얼마나 많은 공력과 재력을 들여 그를 키웠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의 모습을 한 가상화폐” 힐난

하지만 이후 그의 행적을 보면 그의 교육에서 뭔가 대단히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던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권 씨는 2022년 5월 테라와 루나가 한꺼번에 무너지기 직전, 자신에게 의구심을 제기한 이에게 “난 가난뱅이들과 논쟁하지 않는다. 그쪽에게 줄 잔돈이 없어 미안하다”고 조롱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가상화폐의 미래에 대해 “(나를 뺀) 95%는 사라질 것”이라며 “그런 망해가는 회사들을 보는 것도 즐거움”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 법무부의 공소장에서는 테라·루나 붕괴 이후에도 철저히 부도덕했던 그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는 겉으로는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했지만 지인과의 대화에서는 “꺼지라고 해”라고 발언했고, 위조 여권으로 해외 도피를 하면 처벌을 빠져나갈 수 있다고 자신했다. 말 그대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보이기 힘든 수준의 오만과 교만이었다.

이번 재판에서 판사는 “권 씨의 피해자들로부터 315통의 편지를 받았고, 밤잠을 포기하거나 다른 계획을 취소하며 모두 읽었다”며 “당신이 초래한 인간의 참상을 보여주는 투어였다”고 개탄했다. 편지에서 세계 각지의 피해자들은 자살하거나, 자살을 생각했고, 이혼과 파산, 건강 악화에 시달렸다. 그러나 판사가 권 씨에게 “이 모든 편지를 읽어봤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법률팀이 일부를 읽어줬다”고 답했다.

그런 권 씨를 두고 한 외신은 “그는 인간의 모습을 한 가상화폐일지 모른다”고 적었다. 공감력이 느껴지지 않는 그의 몰인간성과 맹목적 욕망, 그 안의 위험성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그에게 그 많은 교육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런 교육을 받고 있는 건 권 씨뿐일까. 이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어쩌면 권 씨 사건은 ‘금융 범죄물’이기에 앞서 ‘교육 비극물’이었는지 모른다.



임우선 뉴욕 특파원 ims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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