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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재산 뺏기고 빚만 떠안은 치매 노인들… 유명무실 후견인제

입력 | 2025-12-17 23:30:00


65세 이상 치매 노인 100만 명의 보유 자산 154조 원을 노린 범죄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실태 조사는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다. 한국노년학회가 치매 인구와 고령자의 경제적 학대 피해율 등을 종합한 결과 지난 5년(2020∼2024년)간 금융 범죄에 희생된 치매 환자는 6만7743명으로 추산됐다. 하지만 이 가운데 법적 처벌을 받은 경우는 49명으로 0.1%도 되지 않았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보건복지부 산하 노인보호전문기관의 ‘치매 노인 경제적 학대’ 판정서 379건을 전수 분석한 결과는 정부의 무관심 속에 가려져 있던 치매 금융 범죄의 민낯을 보여준다. 치매 노인의 빚만 남기고 돈을 털어간 가해자의 52%는 남편이나 아내, 자녀, 친인척 등 가족이었다. 요양시설 종사자(32%)와 지인(12%)까지 합하면 96%가 피해자와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재산을 빼돌리는 방식은 환자의 기초연금이나 장애수당에 기생해 다달이 돈을 빼가는 ‘빨대형’, 폭력을 동원하는 ‘협박형’, 인감증명서를 위조해 목돈을 한 번에 가로채는 ‘거액 사냥형’까지 다양했다.

치매 노인을 대상으로 한 경제적 학대는 신체적 정서적 학대 신고를 조사하다 우연히 발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모르고 지나가는 사건이 훨씬 많을 수 있다. 하지만 정부 기관이 용케 포착한 경제적 학대도 수사로 이어지는 경우는 10%도 안 된다. 가해자 대부분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면죄부’를 받거나, 치매 노인의 오락가락한 진술을 어떻게 믿느냐며 법망을 빠져나가는 탓이다.

정부는 2013년 건강할 때 믿을 만한 사람을 후견인으로 정해 두는 ‘임의 후견’ 제도를 도입했지만 12년간 이 제도 신청자는 229명뿐이다. 제출할 서류가 많고 절차가 복잡해 변호사 비용으로만 수백만 원이 든다. 임의 후견 제도가 비싸고 불편하니 대개는 치매 발병 후 가족 간 재산 다툼이 벌어진 뒤에야 법원이 개입하는 ‘법정 후견’에 매달리는 실정이다.

히어로콘텐츠팀이 찾은 일본에선 동네마다 후견지원센터가 있어 모든 절차를 ‘원스톱’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덕분에 임의 후견 신청자가 12만 명에 이르렀다. 예금과 부동산 같은 큰 자산은 전문 후견인이나 신탁 상품에 맡겨두고, 가족은 환자 돌봄에만 집중하도록 역할을 분담한 후론 가족 간 재산 문제로 얼굴 붉힐 일이 없다고 한다. 20년 후엔 국내 치매 노인이 200만 명, 이들의 자산이 414조 원 규모로 불어난다. 이들이 평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후견인 제도의 문턱을 낮추는 등 치매 노인의 든든한 금고지기 역할을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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