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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와 애착의 결합, 피해자가 못 떠나는 이유[김지용의 마음처방]

입력 | 2025-12-14 23:06:00




김지용 연세웰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넷플릭스 드라마 ‘당신이 죽였다’에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이 드라마가 글로벌 톱10 시리즈 부문 1위에 오를 만큼 흥행을 거둔 데는 그만큼 가정폭력이라는 소재로 공감을 끌어낼 지점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매일 평균 648건의 가정폭력이 신고됐다. 가정 내에서 알아서 해결할 일이라며 신고를 잘 하지 않는 점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기도 한다. “왜 계속 그 안에서 힘들게 그러고 있는 거야?”

밖에서 쉽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피해자들이 가해자와 가정을 떠나지 못하는 데에는 뇌과학적인 이유도 있다. 첫 번째로는 피해자의 뇌 속에 만들어진 ‘트라우마 결속’이라는 애착 시스템이다. 가해자들은 폭력 행위를 한 뒤 이를 사과하고 애정이 담긴 행동을 하는 패턴을 자주 보인다. 드라마 속 가해자 역시 폭력을 저지른 다음 날에는 꼭 예쁜 액세서리를 부인에게 선물하며 안아준다. 굉장히 위협적인 상황 뒤에 애정이 담긴 언행이 따라오면, 피해자의 뇌 속에서 도파민과 옥시토신 호르몬이 강하게 분비되며 안도감과 다행감을 느낀다. 만성 불안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다행감은 매우 중독적이다. 이 과정의 반복 속에 ‘이 사람은 나를 아프게 하지만 때로는 나를 구원해 주는 사람이야’라는 믿음이 형성되며, 공포와 애착이 결합된 트라우마 결속이 피해자를 옭아맨다.

가정폭력을 겪는 동안 뇌는 다방면에서 변화하며, 구조 자체가 바뀌기도 한다. 대표적으로는 위협 예측 기능을 하는 우측 섬엽과 공포 반응을 담당하는 편도체의 과활성화가 있다. 안전하지 않은 공간 속에 살면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변화인데, 이로 인해 ‘세상은 위험하다’는 신호가 뇌 내부에서 자동화돼 세상을 더 위험한 곳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예측 불가능한 사람들이 많은 외부 세계로 떠나는 것을 매우 위험한 일로 여기게 만든다.

이렇게 공포 반응을 담당하는 뇌의 시스템이 활성화됐을 때,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담당하는 전전두엽이 힘을 내어 이성적 판단을 내려야만 한다. 그러나 가정폭력에 오래 노출된 사람들은 이 부위의 기능 자체가 저하돼 논리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또한 스트레스 호르몬의 과분비로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 부위의 용적 자체가 줄어드는데, 이로 인해 안전한 상황과 위협적인 상황을 구별하는 힘 자체가 약해진다. 이러한 뇌의 변화들이 합쳐지면 ‘네가 내 상황을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는 거야’라며 도움의 손길 자체를 뿌리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가정폭력 피해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이 공통적인 현상은 오랜 폭력으로 인한 뇌의 변화이지, 그들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다. 이러한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다며 비난하기보다는, 곁에서 최대한 지지하고 응원하며 조금씩 더 나은 선택으로 이끌어 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갖춰지기를 바란다.




※김지용 연세웰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은 2017년 팟캐스트를 시작으로 2019년 1월부터 유튜브 채널 ‘정신과의사 뇌부자들’을 개설해 정신건강 정보를 소개하고 있다. 12월 기준 채널의 구독자 수는 약 30만 명이다. 에세이 ‘빈틈의 위로’의 저자이기도 하다.

김 원장의 ‘피해자가 못 떠나는 뇌과학적 이유’ (https://youtu.be/nI5jKecqRfE?si=qOUnQphVs4GdTS72)


김지용 연세웰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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