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책의 향기]‘보물상자 언박싱’ 황제의 낙이었다

입력 | 2025-11-15 01:40:00

◇애착 유물/정잉 지음·김지민 옮김/484쪽·3만2000원·글항아리
청나라 4대 황제 ‘건륭제’
유물 47점 전용 상자에 보관… 종종 꺼내보며 예술성 만끽
송나라 어용 자기 등 대만 국보 36점 소개




예술 애호가로 유명한 황제 건륭제가 자주 꺼내 보았다는 귀중한 물건 상자인 ‘집경조’ 다보격 목갑. 글항아리 제공


청나라 4대 황제이자 당대 손꼽히던 예술 애호가 건륭제. 그는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자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단운룡문다보격방합(紫檀雲龍紋多寶格方盒)을 꺼내 오라.”

길고 긴 이름의 이 물건은 건륭제가 좋아했던 유물 47점을 각기 다른 모양의 함과 서랍에 보관하도록 만들어진 일종의 ‘보물 상자’다. 작은 옥 조각부터 색색의 도자 잔은 물론이고 유물들을 설명하는 책까지 딸려 있었다. 이 보물 상자를 소장한 대만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관은 이 밖에도 거장의 산수화와 글씨, 공예품 등 중국 황실의 방대한 유물을 갖고 있으니 ‘훨씬 거대한 자단운룡문다보격방합’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신간은 이 박물관이 소장한 대만의 국보 36점을 소개하는 책이다. 중국 고전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문화유산이나 미술, 문학과 관련된 글을 연재하는 한편 고궁의 국보급 유물을 현대적 시각으로 해설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을 이끌고 박물관을 찾은 경험을 바탕으로 유물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한다.

송나라 때 단 20년 동안만 오로지 황실을 위한 도자기를 제작했던 여요에서 만든 수선화 받침. 글항아리 제공

책의 출발은 도자기로 만든 수선화 받침대다. 저자가 “흰 구름이 살짝 흩어진 뒤 드러나는 가장 깨끗한 푸른색”이라고 표현한 빛을 띤 이 도자기는 송대 ‘여요(汝窯)’에서 제작됐다. 여요는 1086년부터 1106년까지 딱 20년 동안 어용 자기만 제작한 가마. 이곳에서 만든 도자기는 현재 100점도 채 남아 있지 않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여요 자기는 굽는 과정에서 온도 변화로 유약에 균열이 가면서 일정한 무늬가 생긴다. 하지만 이 받침대는 현존 자기 중 유일하게 무늬 없이 깨끗하다.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우연”이라고 한다.

독자가 각 유물을 더 잘 상상할 수 있도록 적절한 예시도 든다. 건륭제를 비롯한 황제의 ‘보물 상자’를 설명할 때는 소셜미디어에서 유행하는 ‘언박싱(unboxing)’에 비유한다. 황실의 초상화를 묘사할 때는 ‘인증샷’도 언급한다. 송나라 때 유행했던 검은 찻잔인 ‘건요(建窯)’의 신비로운 어두운 색은 영국 예술가 데릭 저먼의 책 ‘크로마(Chroma·1994년)’의 대사를 인용했다. “검은색은 절망인가? 폭풍우의 먹구름도 모두 은테를 두르고 있지 않은가? 암흑 속에는 희망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소동파의 서예 작품 ‘한식첩(寒食帖)’은 건륭제의 수중에 들어갔다가 일본 수장가에게 넘어갔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라졌다가 기적처럼 타이베이 박물관에 다시 등장했다는 소장 스토리도 소개했다. 이런 사연은 당대 최고의 문인으로 사랑받았지만, 정쟁에 휘말려 끊임없는 유랑을 했던 소동파의 삶과 겹쳐진다고 전했다.

유물의 모양과 제작 과정, 감상기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건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박물관은 청나라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3대가 수장한 유물이 중심이다. 세 황제가 문화의 전성기를 이끈 과정도 흥미롭다. 대범한 강희제, 문인의 노선을 밟은 옹정제, 이를 계승해 뛰어난 ‘궁정 예술 총감독’이 된 건륭제의 모습이 유물과 함께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타이베이 고궁박물관의 인기 유물 중 하나인 ‘산호괴성점두분경’. 글항아리 제공

타이베이 고궁박물관은 1925년 중국 베이징 쯔진청(紫禁城)에 설립됐지만, 1930년대 일제 침략과 1948년 국공 내전으로 국민당 정부가 대부분의 유물을 대만으로 옮겨 와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요즘 한국에서도 국립중앙박물관 등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방대한 중국 유물 컬렉션을 갖춘 이웃 나라 박물관의 스토리라서 더 눈길을 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트랜드뉴스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