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용 칼럼니스트
오랜만에 연락을 나눈 지인 A의 말 속 ‘님’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최애’ 멤버다. A 씨는 몇 달 치 월급을 모아 팬미팅에 참석하는 강성 팬이다. 그렇게 좋아하던 멤버에게 군 공백기가 생기면 그는 어떻게 지내야 할까. 노래만 계속 들어야 하나. A 씨는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생긋 웃었다. “그래서 넘어갔죠. 두산 베어스로.” 친동생이 좋아하는 팀이라 같이 보게 됐는데 요즘은 아무개 선수와 특유의 서사가 좋다고.
A 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돌에서 프로야구로 갈아탔다’는 20, 30대 여성 사례를 작년부터 꽤 들었다. 수치로도 증명된다. 프로야구는 2024년 처음으로 관중 수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올해는 시즌도 안 끝났는데 이미 지난해 관중 수를 넘어섰다. 2025년 프로야구 입장권 구매자의 연령별 성별 비율을 보면 1위는 20대 여성(23.4%)이다. 30대 여성까지 더하면 37.7%까지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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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에는 좋은 일이다. 한국의 아이돌 팬은 무조건적 지지자가 아니다. 이들의 사고방식은 적극적 주주자본주의나 행동주의 펀드에 가깝다. 야구를 모르고 막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일 때문에 만났던 20대 여성 야구팬 B 씨는 타자의 재능을 논하며 “삼진이 문제가 아니다. 노리는 공에만 방망이가 나간다면 헛스윙이어도 괜찮다. 생각 없는 스윙이 문제”라는 명언을 남겼다. 올해 프로야구는 역대급 순위 경쟁 중인데, 현재 B 씨의 예언대로 순위가 맞아 들어가고 있다. 어디서든 발전의 뿌리는 성숙한 소비자다. 2030 여성은 굉장히 성숙하고 수준 높은 소비자다.
아이돌계에는 위기 혹은 변화의 전조다. 20대 여성 인구와 가처분소득에는 한계가 있으니 프로야구 여성 팬 증가는 아이돌 여성 팬의 감소라 볼 수도 있다. 아이돌을 위시한 K팝 비즈니스의 수익모델 중 하나는 과몰입한 팬들의 과소비다. 이제 아이돌 팬 활동이 너무 비싸서 여성들이 저렴한 야구로 이탈하는 건지도 모른다. 기존 고가 소비를 하던 한국인 K팝 팬들의 빈자리는 중국 팬들이 채우고 있다고 한다. 보통 대중국 시장이 커지면 산업이 덜 건강해지는데, K팝계는 이에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하다.
이 상황에서 가장 억울할 건 기존 프로야구 팬이다. 이제 표 사기도 어렵다. 한가한 아저씨들이 모이던 야구장 분위기도 더는 없다. 역시 어쩔 수 없다. 프리미어리그에서 F1에 이르는 모든 스포츠의 숙명이다. 21세기 최고의 쇼는 스포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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