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궁정 의복 관련 칙령 발표해… 궁중복-액세서리 프랑스산만 허용 수입 의존 레이스 등 국내생산 길 열어… 프랑스 산업 구조 ‘패션 중심’ 재편화 레드힐-가발 통해 군주적 존재감 과시… 유럽 전역 퍼지며 英-獨 왕궁에 영향 차별적 권위 드러낸 시각적 장치 활용
야생트 리고가 그린 프랑스 루이 14세의 공식 초상화. 루이 14세의 은빛 드레스와 붉은색 휘장 등은 프랑스산 실크로 제작됐다. 사진 출처 루브르 박물관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당시 최고의 사치품으로 꼽히던 레이스는 베네치아에서 주로 수입됐다. 하지만 루이 14세의 결단 이후 프랑스 장인들은 본격적으로 레이스 제작에 나섰다. 초상화에 보이는 것처럼 폭이 넓은 화려한 레이스는 프랑스 장인들이 오랜 시간 공들여 제작한 것이다.
화려한 파란색 모피 망토 안에 보이는 왕의 은빛 드레스와 화면을 가득 채운 붉은색 휘장도 프랑스에서 제작한 실크이다. 프랑스는 실크를 주로 밀라노에서 수입했지만, 루이 14세의 결정 이후 프랑스 리옹 지역에서 대량 생산하게 됐다. 기록에 따르면 리옹 지역의 베틀(비단을 짜는 기구) 수는 1660년 3296대에서 1720년 5067대로 증가했다. 그리고 왕의 뒤쪽에 자리한 위엄 있는 팔걸이의자와 함께 바닥에 깔린 고급 카펫은 루이 14세가 아낌없이 지원한 고블랭(Gobelins) 공방에서 제작한 것이다.
● 패션으로 왕의 권위와 위엄 드러낸 루이 1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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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속 루이 14세 목에 둘러진 화려한 레이스를 확대한 것. 레이스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주로 수입됐지만 루이 14세의 의복 칙령 발표 이후 프랑스에서 자체적으로 생산됐다. 사진 출처 루브르 박물관
루이 14세가 신은 레드 힐. 레드 힐은 유럽 전역에 퍼지며 유럽 궁정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사진 출처 루브르 박물관
레드 힐은 프랑스 왕실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리고의 초상화 속 루이 14세가 과시하듯 드러내는 레드 힐은 이후 루이 15세와 16세의 공식 초상화에서도 등장한다. 굽의 높낮이는 살짝 달라지지만, 붉은 색채는 여전히 강렬히 강조됐다.
레드 힐은 베르사유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루이 14세의 정적이었던 네덜란드의 빌럼 3세조차 이를 착용했고, 영국의 조지 2세, 3세, 4세 모두 대관식 초상화에 이 신발을 신고 있는 모습이 담겼다. 오스트리아나 독일, 18세기 포르투갈 궁정의 초상화에도 붉은 굽이 등장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 붉은 굽 구두는 귀족적 허영의 상징으로 조롱받기도 했지만, 상징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영국의 경우 국왕의 시종들은 국회 개원식이나 중요 행사에서 여전히 붉은 굽 구두를 신는다. 결국 루이 14세가 도입한 레드 힐은 단순한 유행을 넘어 왕권의 과시와 차별적 권위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자 유럽 궁정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 패션 정치로 유럽 전역에 영향 끼친 루이 14세
루이 14세가 각인한 드레스 코드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프랑스 사회 전체의 산업 구조에도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프랑스의 패션 산업은 이때부터 놀라운 성장을 이룬다. 루이 14세 시대에 파리에서 일하던 임금 노동자의 약 3분의 1이 패션 관련 산업에 종사했다고 전해진다. 1847년 통계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96만9863명의 노동자가 의류, 장신구, 신발, 레이스 등 패션 산업에 종사했다. 이는 당시 제철업 노동자 수가 3만8000명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해 프랑스 경제에서 패션 산업의 비중이 일찍부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궁정 귀족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 해마다 최소 두 차례, 여름옷과 겨울옷을 새로 맞추어야 했다. 베르사유에 상주하던 약 5000명의 귀족이 이를 이행했는데 궁정 예복 한 벌의 가격은 노동자의 6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2000리브르에 달했다. 루이 14세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에게 더 큰 관심과 혜택을 줬다. 이 때문에 경제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패션은 귀족들의 경쟁을 심화시키는 장치로 기능했다. 일부 연구자는 이를 통해 왕이 귀족들의 재산을 탕진시켜 이들의 권력을 약화시켰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루이 14세가 귀족들에게 높은 연금으로 충분한 보상을 줬다는 점에서 이보다는 그가 귀족들을 예술과 패션에 몰두하게 만들어 정치적 긴장을 예술적으로 해소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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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첫 패션 잡지인 ‘메르퀴르 갈랑’의 1678년 1월호에 실린 삽화. 사진 출처 프랑스 국립도서관
72년간 프랑스를 통치한 루이 14세는 공(功)과 과(過)가 뚜렷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집권 말기에는 전쟁으로 지나치게 국력을 소모시켰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프랑스 하면 떠오르는 고급스러움과 화려함의 시작을 알린 주인공이란 점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루이 14세는 전투적 군주이면서 동시에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에 패션의 패러다임을 형성한 문화적 군주였던 셈이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