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문제에 시달린 미켈란젤로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안에서 추기경들이 모여 콘클라베를 하는 모습. 성당은 천장과 벽면을 거장들의 작품으로 채워 미술 애호가들에게 아주 특별한 곳이다. 사진 출처 시스타나 성당 홈페이지·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비밀 유지가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추기경 선거인단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표를 얻을 때까지 ‘끝짱 투표’가 이뤄지는 만큼 투표가 한없이 지속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회의장을 밖에서 걸어 잠가 추기경단에 빠른 합의를 촉구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번 콘클라베에서는 단 이틀 만에 새 교황 레오 14세를 선출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새 교황을 찾는 데 무려 1006일이나 걸린 적도 있다. 교황 클레멘스 4세가 1268년 11월 선종했을 때다. 당시 추기경 수는 15명에 불과했으나 각자 의견이 강하게 대립하면서 합의가 쉽게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교황 선출이 3년 가까이 지연되자 시민들은 선거 장소를 잠근 뒤 빵과 물만 공급하며 빠른 결정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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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선거가 있을 때마다 선출 방식과 함께 부각되는 곳이 있다. 바로 콘클라베가 열리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이다. 시스티나 성당의 명칭은 이 성당을 1483년 축성한 교황 식스토 4세의 이름을 땄다. 이전까지 콘클라베는 교황의 궁전에서 이뤄졌지만 시스티나 성당 완공 이후에는 이 성당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
시스티나 성당은 미술 애호가들에게 아주 특별한 곳이기도 하다. 보티첼리, 페루지노와 같은 15세기 후반 대가들의 작품이 양쪽 벽면을 채우고 있는 한편 이탈리아 르네상스 대표 예술가인 미켈란젤로의 명작이 천장과 벽면에 한가득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켈란젤로가 1508년부터 1512년까지 약 5년에 걸쳐 시스티나 천장에 그려 넣은 구약성서 창세기의 장면은 미술사의 역사를 바꿔놓았다고 할 만큼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구약성서 창세기 내용을 바탕으로 미켈란젤로가 성당 천장에 그려 넣은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1508∼1512년). 벽화 가운데에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아담의 창조’가 있다. 사진 출처 시스타나 성당 홈페이지·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렇게 거대하면서 작업하기에 높고 위험하기까지 한 천장에 그림을 그려 넣겠다는 과감한 결정을 내린 장본인은 교황 율리오 2세(1503년 10월∼1513년 2월 재위)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연상시키는 교황명에서도 느껴지듯 그는 전투적인 교황으로 전쟁을 통해 교황 지위를 강화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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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초상(다니엘레 다 볼테라·1545년경). 사진 출처 시스타나 성당 홈페이지·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교황 율리오 2세는 전쟁뿐만 아니라 미술에서도 과감한 선택을 자주 했다. 어쩌면 그의 진정한 성과는 미술에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업적이 바로 미켈란젤로를 발탁해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게 한 것이다.
“나는 조각가이지 화가가 아닙니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천장화를 그리라는 교황의 명령에 거듭 거절했다. 그러나 결국 교황의 뜻을 따랐다. 여기에도 교황의 용인술이 효과를 발휘했다.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가 제안을 거절하면 이 프로젝트를 라파엘로에게 맡기겠다는 메시지를 넌지시 던졌다. 당시 라파엘로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미켈란젤로는 경쟁심에 결국 교황의 부름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후에도 교황과 미켈란젤로의 관계는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는 그가 교황 앞에서 대들다가 얻어맞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시스티나 천장화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때였다. 교황 율리오 2세가 작업을 재촉하자 미켈란젤로는 “내가 끝날 때 끝나겠지요”라며 성의 없이 대꾸해 교황을 격분시켰다. 화가 난 율리오 2세는 손에 든 지팡이로 미켈란젤로의 머리를 내리쳤다. 교황에게 얻어맞은 미켈란젤로가 고향 피렌체로 돌아가려고 하자 교황은 밀린 임금 금화 500두카트를 한꺼번에 보내 그의 마음을 겨우 되돌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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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천장화를 통해 미켈란젤로가 받은 임금에 대해서는 두 개의 기록이 전해진다. 먼저 조르조 바자리의 ‘미술가 열전’에 의하면 총 1만5000두카트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4년간 매년 3000두카트씩 받고 마지막 해에 2000두카트와 보너스 같은 상금을 받았다면 이 기록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바자리의 기록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자신의 생애를 제자 아스카니오 콘디비에게 직접 구술해서 출판한다. 바자리의 전기는 1550년에 처음 출판됐는데 3년 만에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전기를 출판하는 것을 보면 성격이 급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렇게 해서 출판된 콘디비의 전기 ‘미켈란젤로의 생애’에 따르면 그는 3000두카트만 받은 것으로 돼 있다. 그리고 3000두카트 안에 재료비가 포함됐다고 주장하면서 ‘그야말로 최소한의 비용만 받고 교황을 위해 헌신했다’고 주장했다.
베네치아 금화 ‘두카트’의 앞면과 뒷면.
어느 쪽 주장이 더 신빙성이 있는지 확인하려면 당시 화가의 임금 체계와 비교해 더 면밀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문제는 1만5000두카트든 3000두카트든 교회로서는 투자를 아주 잘 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완성된 지 5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시스티나 성당의 권위를 예술적으로 드높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투자 대비 이득은 상상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