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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번 수술 견디고 다리 살려내… 등산이 더 즐거워졌다”[병을 이겨내는 사람들]

입력 | 2023-08-26 01:40:00

황규태 한양대병원 정형외과·김연환 성형외과 교수·만성 골수염 신용명 씨
60여 년 전 초등 4학년 때 첫 발병… 면역력 떨어지자 40대 때 첫 재발
재발 인식 못해 50대 때 더 악화… 뒤늦게 찾은 병원 “다리 절제 불가피”
두 교수 “다리 살려보자” 희망 던져…11회 수술 시행한 뒤 사실상 완치



만성 골수염 환자인 신용명 씨(가운데)는 한쪽 다리를 통째로 절단해야 할 위기를 극복하면서 사실상 완치 판정을 받았다. 한양대병원 골수염클리닉을 담당하고 있는 황규태 정형외과 교수(왼쪽)와 김연환 성형외과 교수는 11회의 수술을 시행한 끝에 이런 결과를 이뤄냈다. 두 교수가 진료실에서 신 씨 몸 상태를 체크한 뒤 포즈를 취했다. 한양대병원 제공


세균에 감염된 뼈에 염증이 생기면 골수염이 된다. 무릎 주변 부위에서 많이 발생한다. 청소년 때 발병하는 경우가 많다. 통증과 발열이 대표적인 증세다. 항생제를 처방하는 등 초기에 제대로 대처하면 후유증이나 합병증 없이 완치에 가까워진다.

치료하지 않으면 만성 골수염으로 악화할 수 있다. 이때는 증세가 훨씬 심각해진다. 상처 부위에서 고름이 나고, 피부가 썩는다. 물론 치료도 훨씬 어려워진다. 뼈 안의 염증을 다 긁어내는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고, 더 심하면 다리 자체를 절단할 수도 있다.

신용명 씨(69)는 중증 만성 골수염 환자였다. 오른쪽 다리를 통째로 잃을 뻔했다. 하지만 한양대병원 골수염클리닉의 황규태 정형외과 교수와 김연환 성형외과 교수에게 여러 차례 수술을 받고 나서 다리도 살리고, 병으로부터도 해방됐다. 요즘 신 씨는 튼튼한 두 다리로 산에 오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 60년 전 발병, 32년 후 재발
약 60년 전, 그러니까 신 씨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오른쪽 무릎 위쪽 부위에서 열이 나고 통증이 느껴졌다.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얼마 후 고름까지 나왔다. 동네 의원에 갔다. 의사가 준 약을 꾸준히 먹고, 상처 부위를 잘 소독했다. 4년 만에 증세가 사라졌다. 신 씨는 병이 나았다고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신 씨는 자신의 병을 잘 몰랐다. 나중에야 그게 만성 골수염이며, 면역력이 떨어지면 재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후로는 재발을 막기 위해 면역력 강화에 특히 신경 썼다. 무엇보다 꾸준히 운동했다. 수시로 산에 올랐다. 암벽 등반에도 도전했다. 그 밖에도 운동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다 했다. 체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40대가 되자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1996년, 오른쪽 다리에서 통증이 다시 나타났다. 열도 느껴졌다. 신 씨는 만성 골수염이 재발한 게 아닌가 걱정됐다. 병원에 갔더니 항생제를 처방해줬다. 15일 동안 그 약을 먹었다. 다행히 증세가 사라졌다. 신 씨는 그제야 만성 골수염이 재발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신 씨의 오판이었다. 32년 만에 병이 재발했지만 증세가 곧 사라지니 그 사실을 몰랐을 뿐이었다. 황 교수는 “신 씨와 같은 사례가 적잖다. 소아청소년기에 발병했을 때 균을 완벽하게 제거하지 않을 경우 균이 뼈 안에 잠복해 있다가 면역력이 떨어지면 활동을 재개한다”라고 말했다.

재발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신 씨는 더 이상의 치료를 받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병은 악화하고 있었다. 다시 10년이 지난 2006년, 허벅지 통증이 시작됐다. 50대 초반으로 접어들면서 면역력이 더 떨어지자 숨죽이고 있던 균들이 더 왕성하게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 “자가 치료로 버티다 더 악화”
증세는 40대 때보다 더 심했다. 하지만 신 씨는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다. 당시 그의 아내가 간암 투병 중이었던 것. 자신의 병을 신경 쓸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아내를 돌보고, 가족을 챙겨야 했다. 동네 정형외과에 가서 약을 처방받아 먹으면서 버텼다.

얼마 후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불행이 겹쳤다. 그의 모친이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매달 한두 번은 시골로 내려가 어머니를 살펴야 했다. 그 자신의 치료는 계속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그대로 뒀다가 골수암으로 악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그는 집에서 상처 부위를 소독하고 항생제를 먹는 식의 ‘자가 치료’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신 씨가 만성 골수염 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은 것은 2019년 초가을이었다. 그 사이에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힘든 일을 거푸 겪다 보니 신 씨의 투병 의지도 많이 꺾였다. 하지만 성장한 자식들이 신 씨에게 치료를 강하게 권했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치료를 받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한 대형 병원을 찾았다.

의사가 그의 상태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뼈에서 흘러 나온 고름이 피부를 녹이고 있었다. 고름의 양도 너무 많았고, 역겨운 냄새가 진동했다.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결과는 그만큼 최악이었다.

의사는 골반 바로 아래쪽부터 다리 전체를 절제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판정이었다. 무릎 주변에서 절제한다면 의족이라도 착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의사의 판단대로라면 의족 자체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신 씨는 다른 병원을 물색했다. 마침 황 교수가 해외 연수를 끝내고 막 돌아와 한양대병원 골수염 클리닉이 다시 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신 씨는 다리 절제 수술 예정일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이 클리닉을 찾았다.

● 11번의 수술 극복, 사실상 완치

황 교수와 김 교수도 신 씨의 상태에 적잖이 놀랐다. 다리를 통째로 절제해야 한다는 다른 병원 의료진의 판단이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른쪽 허벅지 위쪽 20㎝ 정도가 썩어 있었다. 피부는 다 녹았다. 진료실에 악취가 퍼져 1시간 가까이 환기를 해야 했다. 그래도 황 교수는 도전해 보기로 했다. 염증 제거 수술을 먼저 하고, 만약 실패하면 그때 가서 다리를 절제하자고 판단한 것.

상처 부위가 워낙 커서 한 번의 수술로는 부족했다. 출혈량도 너무 많았다. 이 때문에 매주 1회씩, 두 달 동안 8회의 수술을 시행했다. 그때마다 죽은 조직을 제거하고 뼈 안의 염증을 긁어냈다. 수술이 끝나면 균 배양 검사를 했다.

결과는 좋았다. 염증 수치가 점점 떨어졌다. 다만 뼈가 약해질 수 있어 추가 조치가 필요했다. 이듬해 12월, 뼈 안에 인공 물질을 채워 넣는 수술을 했다. 아홉 번째 수술이었다.

이때까지 신 씨의 허벅지는 피부가 없이 ‘열린’ 상태였다. 김 교수가 피부 이식 수술을 시행했다. 옆구리에서 피부조직을 떼어내 허벅지에 이식했다. 이식한 피부의 크기만 해도 가로 24㎝에, 세로 16㎝였다. 피부와 혈관을 성공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열 번째 수술도 잘 끝났다.

이후 신 씨는 매월 병원을 찾아 몸 상태를 검사했다. 9개월이 지나자 염증 수치가 정상 수준으로 떨어졌다. 의료진은 재발 위험이 없다고 판단하고, 마지막으로 뼈 이식 수술을 시행했다. 먼저 김 교수가 종아리의 얇은 뼈를 20㎝ 정도 잘라내 허벅지에 이식했다. 이어 황 교수가 양쪽 골반에서 각각 8㎝씩 뼈를 떼어내 다시 허벅지에 이식했다.

2021년 4월, 이식한 뼈가 잘 붙어있는 게 확인됐다. 황 교수는 사실상 완치를 선언했다.

● “적극적 운동-투병 의지가 회복 도와”

완치라고는 하지만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다. 황 교수는 “물론 병의 특성상 재발의 위험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증세가 나타났을 때 바로 조치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 씨는 미세하게나마 균이 뼈 안에 남아 있을 수 있어 6개월마다 몸 상태를 살피고 있다.

신 씨가 다리를 절제해야 할 위험을 극복하고 사실상 완치에 이른 비결은 뭘까. 신 씨는 “희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처음 진료를 받았을 때 두 교수가 치료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줬다. 덕분에 힘든 것도 모를 만큼 적극적으로 투병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걸어서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자 하루라도 더 빨리 건강을 회복하고 싶었다. 신 씨는 몸을 세우지 못할 때는 병상에 누워서 팔로만 상체를 지탱하는 운동을 했다.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문 뒤에는 병상을 활용해 근력 운동을 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하루에 3∼4시간을 빠지지 않고 운동했다. 황 교수는 “신 씨가 적극적으로 운동한 것이 회복에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어떨 때는 지나칠 정도로 많이 운동하는 바람에 말리기도 했다”며 웃었다.

신 씨는 이식한 뼈가 붙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후부터 보조 장비 도움 없이 걷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토록 좋아하던 등산을 재개했다. 평지를 다닐 때와 달리 이때는 보조 장비가 필요했다.

지난해 3월, 마침내 보조 장비의 도움을 일절 받지 않고 처음 산에 올랐다. 그 후로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별 어려움 없이 산행을 즐기고 있다. 신 씨는 “산에 오르는 즐거움이 훨씬 더 커진 것 같다”며 웃었다.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