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제랄 교수는 내가 할 수 없는 낮은 주파수 영역을, 나는 그가 할 수 없는 높은 주파수를 연구하고 있어서, 공동 연구를 한다면 전 주파수를 연구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제랄 교수가 먼저 내게 제안했다. “낭트에 에어버스 비행기에 쓰이는 탄소섬유 공장이 있고, 나는 비행기에 쓰이는 탄소섬유의 결함을 연구하고 있어. 당신과 함께 연구하면 재밌겠어. 내가 초대할 테니 프랑스에 올래?” 그때는 소주 한잔 마시고 지나가는 말로 한 것이려니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3개월 초청장이 날아왔다.
한 사람이 발표하면 다른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들이지만 질문을 던졌고, 토론이 끝없이 이어졌다. 지도교수가 그 과정을 조심스럽게 조종하고 만들어갔다. 열려 있는 과학의 세계란 이런 세계가 아닌가, 싶었다. 과학은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과학 연구란 남들이 생각할 수 없고, 도달하지 못한 보편타당한 과학적 사실을 창의적으로 밝혀내는 일이다. 이런 과정이 과학의 본질이다.
당시 연구소 앞 바닷가 동네에 다락방을 얻어 생활했다. 연구하는 시간 외에는 아침저녁으로 음악을 들으며 바닷가를 산책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었다. 퇴근 후에는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겼다.
그 후 나는 제랄 교수를 서울에 초청했고, 그는 서울의 경복궁 옆 창성동의 허름한 한옥에 머물렀다. 나지막한 서촌의 골목골목이 만들어내는 풍경과 한옥의 멋진 정취를 그 누구보다도 좋아했다. 이렇게 서로를 방문하고 연구하고 공동으로 논문을 발표하면서 가족처럼 지낸 지 15년이 흘렀다.
이번 프랑스 방문에도 역시 사각의 책상으로 둘러싸인 세미나실에서 오후 세미나가 열렸다. 내가 발표를 끝마치자 차분히 질문에 질문이 이어지고 본인의 이견을 노트북으로 보여주었다. 토론은 끝이 없었다. 이런 과정을 조용히 서서 지켜보면서, 새삼 여기 모인 사람들이 과학이라는 학문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미나가 끝나고 샴페인 파티가 열렸다. 과학 하는 즐거움이 샴페인의 가벼운 탄산처럼 청량하게 흘러넘쳤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