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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이정은]마르코스 가문의 부활

입력 | 2022-05-10 03:00:00


아버지는 고문과 숙청, 살인을 일삼던 독재자. 어머니는 부패한 ‘사치의 여왕’.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의 집안 내력은 그의 정치 인생을 가로막을 거의 모든 조건을 갖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은 잘 몰라도 부인 이멜다의 방에서 발견됐다는 3000켤레의 구두 이야기는 안 들어본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 아들인 마르코스 주니어가 9일 필리핀 대선에서 사실상 승리를 거뒀다.

▷‘봉봉’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마르코스 주니어는 대선 캠페인에서 줄곧 선두를 달려왔다. 60% 가까운 지지율을 확보하며 경쟁자인 레니 로브레도 부통령과의 격차를 두 배 이상 벌렸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현 대통령의 딸인 사라를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삼아 ‘현재와 미래 권력의 결합’을 과시했다. 당선이 공식 확정되면 인권탄압과 독재로 쫓겨났던 마르코스 일가가 36년 만에 다시 권력을 쥐게 되는 것이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하와이 망명 중 사망했지만, 올해 93세 이멜다는 아들과 함께 대통령궁에 복귀하게 된다.

▷혜성처럼 갑작스러운 등장도 아니었다. 1986년 부모와 함께 망명길에 올랐던 봉봉 마르코스는 5년 만에 필리핀으로 돌아온 뒤 곧바로 35세 나이에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주지사, 상원의원을 거치며 정치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는 부모의 죄에 대해 “당시 너무 어렸고 상황을 몰랐다”며 책임을 부인해왔다. 틱톡 같은 소셜미디어에는 마르코스 일가의 범죄가 정적에 의해 부풀려진 허위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콘텐츠가 넘쳐난다. 과거 흑역사를 잘 모르는 젊은층 표심을 겨냥한 것들이다.

▷명망가 집안을 유독 선호하는 필리핀의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도 이번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7600개 섬으로 이뤄진, 80개가 넘는 언어가 사용되는 나라에서 정치는 늘 소수 족벌 엘리트 정치가문들의 전유물이었다. 스페인 식민통치 시절 땅을 얻어 부를 축적한 400여 개의 크고 작은 가문이 그들이다. 정치적 결속력을 갖기 어려운 필리핀인들을 향해 선거 때면 이른바 ‘3G(Guns, Goons, Gold)’가 동원된 적도 많았다. 총, 깡패, 황금의 세 가지로 표심을 위협하거나 매수한다는 의미다.

▷36년 전 마르코스 일가를 몰아냈던 필리핀의 ‘피플 파워’ 혁명은 아시아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반(反)독재 시위 도미노에도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오랜 경기침체와 빈곤, 정치 혼란에 필리핀인들도 지쳐가는 걸까. ‘스트롱맨’으로 포장된 권위주의 리더십에 대한 향수가 정치판에 스며들고, 민주화의 성과는 그에 밀려 빛이 바래간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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