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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를 다시 위대하게” 푸틴의 뒤틀린 외침[김수현의 세계 한 조각]

입력 | 2022-04-19 18:03:00


2018년 5월 7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4번째 임기가 시작됐다. 서방과의 화합을 중시했던 집권 초와 다르게 ‘러시아의 부활’을 강조한 푸틴은 옛 소련 영토 내 러시아 패권을 회복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한다. 사진은 크렘린궁 내 대성당에서 열린 취임 감사예배에 참석한 푸틴. 크렘린궁 홈페이지


●러시아를 다시 위대하게
2014년 6월.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굼(GUM)’ 백화점 앞으로 수백 명이 사람들이 몰립니다. 이 날 열린 ‘깜짝 가게’ 때문인데요, 각양각색의 티셔츠 속에 공통적으로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입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 전자상거래 사이트 ‘아마존’에서 판매되던 푸틴 티셔츠(왼쪽). 현재는 검색되지 않는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름반도 강제 병합 이후 ‘가장 정중한 사람들’이라는 문구와 함께 군복을 입은 푸틴이 그려진 티셔츠가 열풍을 일으켰다(오른쪽). 인터넷 화면 캡처




‘패션이 곧 애국’ 2014년 러시아의 크름반도 강제 합병 이후 역설적으로 세계 곳곳에서는 ‘푸틴 굿즈’ 열풍이 일어납니다. 특히 ‘가장 정중한 사람들(Самый вежливый из людей)’ 문구는 유행처럼 번집니다. 언뜻 칭찬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는 2014년 크름반도를 점령한 러시아군을 지칭합니다. 총을 쏘지 않고 크름반도를 장악했다는 이유로 러시아는 자국 군인들에게 ‘정중한 사람들’이라는 호칭을 부여한 것입니다.


러시아 크렘린궁이 공개한 푸틴 사진 일부. 아이스하키, 유도 등을 하며 활동적인 이미지를 부각했다. 2019년에는 가죽 자켓을 입은 채 오토바이를 타고 크름반도를 방문하며 ‘마초’ 이미지를 강조했다(아래). 크렘린궁 홈페이지



말 위의 영웅, 유도 마스터, 팔씨름 제왕, 하키 천재…집권 초부터 ‘강한 지도자’ 이미지에 집착한 푸틴 대통령은 2012년 세 번째 대통령 임기를 기점으로 ‘구원자’ 이미지를 추가합니다. 서방 국가들의 탄압 속에 오직 본인만이 러시아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미-러 동상이몽

2008년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러시아-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에서 기자회견을 앞두고 푸틴이 걸어 나가고 있다. 크렘린궁 홈페이지



2008년 4월 3일. 이날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가 진행됐습니다. 그리고 이날 나토는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염원을 환영한다”는 선언문을 채택했습니다. 비록 양국은 나토 가입의 첫 법적 절차인 ‘회원국 자격 행동 계획’(MAP) 지위 확보에는 실패했지만, ‘열린 결말’은 푸틴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당시 우크라이나 내 나토 가입을 지지하는 여론은 30%에 불과했습니다. 가스와 원유 등 러시아에 의존하던 부분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사람은 다름 아닌 푸틴의 ‘친구’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입니다. 임기 마지막 정상회의에 참여한 그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겠다”며 “러시아는 이를 거부할 권리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부쿠레슈티 나토 정상회의 직후 러시아 소치에서 미-러 정상회담을 위해 만난 부시(왼쪽)와 푸틴이 한 부둣가에서 대화 중이다. 크렘린궁 홈페이지



사실, 2001년 9.11 테러를 기점으로 미국과 러시아 간 관계는 탈냉전 이후 최전성기인 ‘9.11 신혼(honeymoon)’에 돌입합니다. 테러 이틀 전 부시에게 아프가니스탄 국방장관의 암살 소식을 전하며 “낌새가 이상하다”고 경고한 것도 푸틴이었습니다.

푸틴이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옛 소련 영토 내 러시아의 패권 회복과 이에 대한 미국의 인정이었습니다. 데탕트를 이끌었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처럼 미국과 서방 국가의 존중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러시아의 ‘뒷마당’인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진압해준 것, 거기에 자국 내 비판도 무릅쓰고 푸틴 대통령의 체첸 전쟁을 묵인한 것으로 ‘감사 표시’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럽 내 패권을 양보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부쿠레슈티 나토 정상회의에서 연설 중인 푸틴. 크렘린궁 홈페이지




“여러분 우리 모두 친구가 되고, 서로에게 솔직해집시다” 러시아 대통령 최초로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한 푸틴은 나토의 노골적인 확장 계획에도 침착한 어조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이 때도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국가로 인정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2008년=2022년



잠깐! 2008년 조지아 침공이란

2008년 8월 8일 러시아군은 전날 조지아가 분리 지역인 남오세티야를 침공하자 자국민 보호를 주장하며 조지아를 침공했다. 이후 러시아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조지아는 단 5일만에 항복을 선언한다. 전쟁 이후 러시아는 친(親)러시아계 자치 공화국이었던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의 독립을 승인한다.

2008년 8월 8일 조지아 내 친러시아 분리 지역인 남오세티야를 향해 러시아군 장갑차들이 이동하고 있다. 러시아군 옆으로 러시아 국기가 보인다. AP=뉴시스



조지아의 나토 가입이 논의됐던 그 순간부터 푸틴의 조지아 침공은 예견된 일이었을 수 있습니다. 부쿠레슈티 정상회의가 끝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푸틴은 남오세티야, 압하지야 지역에 병력 배치를 지시합니다.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미 국무장관 역시 “러시아가 지난 몇 달간 이번 작전을 준비했다”고 비판하죠.

그러나 푸틴은 대선을 앞두고 있던 미국이 조지아를 꾀어내면서 이번 전쟁이 발발했다고 반박합니다. 당시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를 밀어주기 위해 백악관이 의도적으로 신(新)냉전의 기류를 형성했다는 것입니다. 또 푸틴은 미국이 의도적으로 전쟁을 방치했다고 비판합니다. “남오세티야에 탱크를 배치시키기 전 나는 그(부시)에게 조지아의 선제공격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그의 참모들은 전쟁을 막을 생각이 없어보였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한편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은 2008년 조지아 침공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입니다. ▽이전부터 분리 지역 주민들에게 러시아 여권을 제공한 점 ▽침공 직전 병력 일부를 철수하며 가짜 화해 신호를 보낸 점 ▽상대방이 무력 도발을 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린 점 ▽민간인 피해와 대피를 주장한 점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침공을 시작한 점 모두 2008년 그대로입니다.

지난달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에서 한 여성이 러시아의 침공에 맞선 우크라이나에 응원의 메시지를 적고 있다. 벽 맨 위에 조지아 국기(왼쪽)과 우크라이나 국기가 그려져 있다. 트빌리시=AP 뉴시스




다만, 우크라이나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의 ‘트로이 목마’ 돈바스


잠깐! 2014년 러시아 크름반도 강제 합병

2014년 2월 유로마이단 시위로 우크라이나 내 친러 정권이 축출되자 위기감을 느낀 친(親)러시아 성향이 크름 자치공화국이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 이후 러시아군이 해당 지역을 점거한다. 3월 주민투표를 실시한 크름 자치공화국은 독립을 선포, 러시아에 편입됐고 현재 이 지역은 러시아가 실질적으로 지배 중이다.

2014년 3월 18일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푸틴(오른쪽에서 5번째)이 크름 자치공화국 지도자들과 함께 크름반도의 러시아 합병을 승인하는 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크렘린궁 홈페이지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푸틴은 “동부 돈바스 지역의 러시아계 주민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희한한 것은 푸틴은 크름반도 강제 합병 직후인 2014년 5월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한스크인민공화국(LPR) 주민들의 요청에도 이들의 독립 승인을 보류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압도적인 찬성률로 독립을 지지하는 주민투표를 거친 후였습니다(푸틴은 생각보다 ‘공식 절차’를 중시하는 인물입니다).

이는 2022년 ‘미치광이 블라드(블라디미르의 줄임말)’와 2014년 ‘합리주의자 푸틴’이 현격히 구분되는 지점입니다. DPR과 LPR이 포함된 돈바스 지역은 2011년 기준 우크라이나 GDP의 16%를 차지하는 우크라이나 경제 중추였습니다. 이곳을 무리하게 점령하다간 자칫 지금처럼 우크라이나의 ‘결사항쟁’을 직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푸틴이 두 분리주의 세력을 인정하지 않은 데는 철저한 계산이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분석입니다. 우선 돈바스 지역과 크름반도는 러시아에게 ‘의미’가 다릅니다. 크름반도는 최초로 러시아 정교회를 국교로 인정한 블라디미르 1세 키예프 공국 대공이 세례를 받은 지역으로 전해집니다. 러시아 국민들에게는 성지이자 정체성이 담긴 지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의 러시아계 주민 비율 역시 58.3%(2001년 기준)에 달합니다. DPR과 LPR의 러시아계 주민 비율 역시 50%에 가깝지만, 돈바스 지역 전체로 봤을 때는 38%에 불과합니다.

푸틴의 계산에는 돈바스 지역의 갈라진 정체성도 고려됩니다. 2014년 돈바스 지역의 북서부 일대에서는 DPR과 LPR의 분리·독립 주민투표에 맞선 ‘통합’ 주민투표가 진행됐고, 주민 약 70%는 우크라이나에 남아있길 희망합니다. 게다가 푸틴 역시 친서방 국가로 돌아선 우크라이나와 직접 국경을 맞대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푸틴은 의도적으로 돈바스 지역의 독립 승인을 보류하며 ‘버퍼 존(buffer zone)’으로 남겨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랬던 푸틴은 8년이 지난 올해 2월, 갑작스럽게 돈바스 지역의 독립을 승인합니다. 이어 채 하루도 되지 않아 우크라이나 영토에 본격 침공을 감행합니다. 푸틴은 왜 갑자기 변한 것일까요? 다음 주는 ‘푸틴 vs. 우크라이나’로 찾아뵙겠습니다.


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