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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배극인]허울뿐인 日 재산공개

입력 | 2022-04-15 03:00:00


최근 공개된 일본 중의원(하원) 의원 재산 공개 내역이 화제다. 전체 465명 중 77명이 재산을 ‘0엔’으로 신고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작년 총리 취임 후 자신과 부인 명의로 2억868만 엔을 신고했는데 이번에는 4983만 엔만 신고했다. 일본은 가족 신고 의무가 없고 신고 내역을 입증할 필요도 없다. 공개 대상도 구멍투성이로 보통예금은 제외된다. 허위 신고에 대한 처벌 규정도 없다. 이날 공개된 중의원 의원 재산 평균은 2924만 엔에 불과했다. 일본 언론도 납득 못 한 금액이다.

▷더 황당한 것은 공개 방법이다. 인터넷이 아니라 종이 보고서 방식이다. 그나마 보고서를 보려면 도쿄 국회의사당 지하 1층의 좁은 열람 공간을 직접 찾아야 한다. 카메라 촬영과 복사도 금지된다. 의원들이 재산 내역을 의회 사무국에 신고할 때도 종이로 된 서류로만 해야 한다. PC로 입력한 파일 자료는 출력해 도장을 찍어 제출해야 한다. 일부 의원은 손으로 메모한 보고서를 제출한다.

▷일본은 1992년 ‘국회의원 자산공개법’이 제정됐다. 1988∼1989년 전후 최대의 부정부패 사건으로 꼽히며 일본 열도를 뒤흔든 ‘리크루트 사건’이 계기였다. 리크루트가 자회사 비상장 주식을 정관계 고위 인사들에게 싸게 뿌려 거액을 챙기게 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 등 실력자들이 물러났다. 정치개혁 바람이 불어 선거제도가 바뀌고 의원들의 재산도 공개하게 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산공개법은 유명무실한 것으로 드러났고, 쫓겨났던 정치인들은 문제없이 복귀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정치 구조 탓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했지만 지배 체제가 뒤집힌 적이 없다. 에도 시대부터 내려온 지역 영주(다이묘) 시스템이 ‘세습 정치’로 이름만 바뀌어 이어지고 있다. 작년 10월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 당선자 3명 중 1명은 세습 정치인이었다. 많이 줄어든 게 이 정도다. 보수 성향이 강한 국민들도 이들을 선호한다. 투표용지에 후보자 이름을 직접 써내는 방식도 이름이 익숙한 세습 후보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이런 정치는 국민 삶과 동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번에 6억1417만 엔을 써내 재산 1위를 차지한 아소 다로 전 부총리. 그는 몇 년 전부터 ‘초당파 골프 의원연맹’ 회장을 맡아 의원들과 이해 관계자 간 골프를 금지한 국가공무원 윤리규정 삭제 요구에 나섰다. 한국 같으면 당장 낙선 운동이 벌어졌겠지만 세습 정치인인 그의 입지는 건재하다. 한국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일본의 정치 풍토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