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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지도자-억만장자들 역외탈세 ‘판도라 문건’ 공개 파문

입력 | 2021-10-04 14:39:00

판도라 페이퍼스. (ICIJ 홈페이지 갈무리). 뉴스1


토니 블레어 전 영국총리와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측근 등 전 세계 주요 정관계 인사와 억만장자들의 역외 탈세 혹은 조세 회피 내역이 줄줄이 공개됐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전 세계 117개국의 150개 언론사들과 함께 탐사취재를 진행해 3일(현지 시간) 내놓은 ‘판도라의 문건(Pandora Papers)’에 이런 내용이 담겼다.

이번 탐사취재에 참여한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판도라의 문건’에는 압둘라 2세 국왕부터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까지 전 세계 90개국의 전현직 지도자 35명을 포함해 고위 공직자 330명과 포브스지에 등록된 억만장자 130여 명의 해외계좌와 거래내역을 분석한 결과가 들어 있다. 중국의 엘리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왕가는 물론 팝스타 샤키라, 유명 모델 클라우디아 쉬퍼 등의 이름도 나온다.

이에 따르면 압둘라 2세 국왕은 미국 워싱턴과 캘리포니아, 영국 런던, 말리부 등 세계 곳곳의 호화주택을 사들이는 데 1억600만 달러를 사용했다. 블레어 전 총리 부부는 부동산을 거래하면서 편법으로 31만2000파운드의 재산세를 절약했고 우후루 케냐타 케냐 대통령, 기예르모 라소 에콰도르 대통령, 안드레이 바비시 체코 대통령도 나라 밖으로 빼돌린 비밀재산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가족과 측근들은 영국에서 4억 파운드 규모의 부동산 거래를 은밀히 해왔다.

러시아에서는 푸틴 대통령의 아이를 출산한 것으로 알려진 여성이 모나코 해안가의 고급주택을 비밀리에 사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푸틴 대통령과 어린시절부터 친구였던 첼리스트도 2억 달러의 자금이 예치된 역외 계좌와 연관돼 있다.

판도라 문건은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와 스위스, 싱가포르, 키프로스 등 조세피난처 14곳을 서비스하는 금융기관과의 거래내역, e메일 등 1190만 건의 금융 관련 파일을 분석했다. 자료들이 작성된 시기는 1996년부터 지난해까지로 일부는 19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있다. 조사된 역외 계좌만 2만9000개. 분석 대상이 된 정보의 양은 3테라바이트로 휴대폰에 저장할 수 있는 사진 75만 장 분량이다.

WP에 따르면 ‘판도라 문건’은 5년 전인 2016년 비슷한 주제와 방식으로 작성됐던 ‘파나마 문건(Panama Papers)’보다 내용이 훨씬 방대하다. ICIJ는 “판도라 문건은 2013년 이후 공개된 일련의 역외탈세 문건 가운데 가장 큰 규모”라며 “글로벌 엘리트들이 전 세계 시민들로부터 수십억 달러를 숨기는데 사용된 비밀 시스템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ICIJ는 미국 워싱턴에 본부를 둔 국제 탐사보도단체로 2013년부터 조세피난처를 활용한 역외탈세 내역을 꾸준히 보도해왔다. ‘판도라의 문건’ 취재에는 WP 외에 영국 BBC방송과 가디언, 프랑스 르몽드, 일본 아사히 신문 등 전 세계 주요 언론들이 상당수 참여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조세피난처 이용 자체가 불법은 아니다. 그러나 각국 지도자들이 비밀리에 거액의 자산이나 부동산을 매입하면서 자국 국민들에게 돌아갈 세금을 내지 않은 것은 문제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그 과정에 부패와 자금세탁, 탈세 등이 동반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실제로 문건 중에는 탈세를 위해 법망을 피해가는 방법이나 내용의 유출을 막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는 내용들도 포함돼 있다.

금융범죄 사례들을 담당했던 전직 FBI 요원 출신인 셰린 에바디는 “역외 금융시스템은 전 세계에서 법을 지키는 모든 사람들이 우려해야 할 문제”라며 “이는 단순히 세금을 회피하도록 해주는 것을 넘어 선한 사회의 기본 틀을 훼손한다”고 비판했다.

WP는 “판도라 문건의 내용에 따라 일부 인사들은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안드레이 바비스 체코 총리의 경우 2009년 프랑스 남부 칸 인근에 2개의 수영장과 영화관이 달린 2200만 달러의 대저택을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구입한 사실이 이번 판도라 문건에서 드러났다. 그는 유럽의 엘리트주의에 맞서는 정치인으로 각인되며 재선을 노려온 인물이다. 우후루 케냐타 케냐 대통령은 ‘부패와의 전쟁’을 밀어붙이며 “모든 공직자는 대중 앞에 재산을 공개해야 한다”고 했지만 판도라 문건에 따르면 그 자신과 친족들은 3000만 달러 이상의 부동산과 자산을 최소 7곳의 역외 기관에 예치했다.

미국 내 최대 부호인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주와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파나마 호텔 프로젝트와 관련한 파일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이미 알려진 내용들이라고 WP는 전했다.

금융 전문가들은 “미국은 자국 내 슈퍼 갑부들에게 적용되는 세율이 낮기 때문에 역외 조세 피난처를 찾아야 할 이유가 적다”는 분석을 내놨다. 또 미국의 부자들은 판도라 문건에서 언급된 곳과는 다른 역외 피난처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판도라 문건에서는 이름이 빠졌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워싱턴=이정은 특파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