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학회-영암문화원 등 주축으로 금정면 생가터에 안내표지판 설치 유적 복원으로 애국정신 널리 알려
1984년 94세의 나이로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남편 강무경의 묘를 찾은 구한말 최초 여성 의병 양방매 할머니의 생전 모습. 영암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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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 평생을 숨어 살았는데 어찌 알고 왔소.”
구한말 최초 여성 의병인 양방매 할머니(1986년 별세)가 1980년대 초 항일 의병사를 연구하던 전남 영암의 향토사학자를 만났을 때 했던 말이다.
70여 년을 자식도 없이 홀로 여생을 보내던 양 할머니는 향토사학자의 노력으로 사후에 여성 의병 가운데 처음으로 건국포장을 받았다. 그녀의 기구한 삶의 시작은 19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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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할머니는 양덕관의 6남매 중 둘째 딸로 18세의 아리따운 처녀였다. 오빠(성일)도 20세의 청년으로 의병에 가담했다. 아버지의 주선으로 강 의병장과 부부의 연을 맺은 그녀는 일본군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토벌전에 나서자 남편을 따라 의병이 되었다.
양 할머니는 남편 부대의 일원으로 장흥 보성 강진 해남 광양 등지의 산악지역을 무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300∼500명의 병력을 거느렸던 강무경은 1909년 3월 8일 남평읍 대항봉에서 매복전을 펼쳐 일본군 100여 명을 사살하고 70여 명을 생포했다. 3월 11일에는 장흥군 한담리에서 일본군 100여 명을 격퇴하고 보성군 웅치에서는 대포 2문 등 무기를 노획했다.
그해 7월 일제의 강압에 못이긴 순종황제가 의병 해산을 권고하는 조치를 내리자 부부는 화순군 능주면 바람재 바윗굴로 피신했다가 1909년 10월 9일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양 할머니는 어리다는 이유로 석방됐지만 열네 살 위인 남편은 대구형무소에서 32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스무 살에 과부가 된 그녀에게 주위에서는 개가를 권하기도 했지만 의병으로 병사한 오빠의 딸 등 친정 조카들을 키우며 모진 세월을 홀로 살았다. 그녀는 남편과 사별한 지 74년째인 1984년 국립서울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86년 96세의 일기로 남편의 뒤를 따랐다. 죽어서 비로소 부부는 함께할 수 있었다. 정부는 양 할머니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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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단체 회원들은 최근 양 할머니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금정면 청룡리 분토동 마을과 작고하기 전까지 살았던 금정면 남송리 집터를 찾았다.
금정면 출신인 김오준 시인은 “최초의 여성 의병인 양 할머니의 생가터가 표지석은 고사하고 안내판 하나 없이 잊혀져 가고 있다”면서 “유적 보존과 복원은 양 할머니의 애국정신을 알리는 소중한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 단체는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꾸리고 범군민 서명운동에 나서는 한편 관련 자료를 수집해 유적 보존과 복원에 나설 방침이다.
이영주 영암군 금정면장은 “금정면에서는 47명이 항일 운동으로 추서를 받았고 이 가운데 의병장이 5명으로, 전국 면단위에서 가장 많다”면서 “양 할머니를 비롯한 항일 의병들의 업적을 알리는 현창사업을 적극 돕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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