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를 받고 싶습니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관들이 1월경 A 씨를 찾아가자 이렇게 먼저 말했다. 조사위원회는 2000~2004년 활동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건네받은 5·18당시 희생자 상황을 분석했다.
광고 로드중
고 박병현 씨(25)는 5·18당시인 1980년 5월 23일 광주시 남구 노대동 소재 노대남제 저수지 부근을 지나갔다. 회사원이던 박 씨는 친구와 함께 농사일을 도우러 고향인 전남 보성으로 가던 길이었다. 박 씨와 친구는 저수지 인근을 통과할 때 계엄군의 총격을 받았고 박 씨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이후 친구는 의문사위에 “당시 군인들이 우리에게 왜 총격을 가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조사위원회는 5·18당시 계엄군 배치현황을 분석해 노대남제 저수지를 순찰한 병력이 7공수여단 33대대라는 것을 확인했다. 조사위원회는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 A 씨가 발포를 한 군인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A 씨는 총격 당시의 상황에 대해 “1개 중대 병력이 광주시 외곽을 차단할 목적으로 정찰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또 “작은 길을 이용해 전남 화순 방향으로 걸어가던 청년 2명이 저희들(공수부대원)을 보고 도망하기에 ‘도망가면 쏜다’고 정지를 명령했다”고 했다. 이어 “겁에 질려 도주하던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사격을 했다”고 덧붙였다.
광고 로드중
A 씨는 41년 동안 마음의 병이 깊었다. 가족은 물론 주변 누구에게 5·18 당시 상황을 고백하지 못했다. A 씨가 유족들에게 사죄를 해 용서를 받으면 마음의 짐을 덜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A 씨의 사죄를 놓고 유족들과 논의가 40여 일 동안 이뤄졌다.
A 씨는 16일 오후 3시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박 씨 유족들을 만나 사죄하고 화해의 자리를 가졌다. 가해자가 직접 발포해 특정인을 숨지게 했다며 유족에게 사과를 한 것이 처음이다.
가해자 A 씨는 희생자 고 박병현 씨의 두 형제를 만나 “어떤 말로도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드려 죄송하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저의 사과가 또 다른 아픔을 줄 것 같아 망설였다”며 울먹였다. A 씨는 유족들에게 큰절을 올리며 “41년 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제라도 만나 용서를 구할 수 있어 다행이다”라고 오열했다.
이에 고 박병현 씨 형인 박종수 씨(73)는 “늦게라도 사과해주어 고맙다. 죽은 동생을 다시 만났다고 생각 하겠다”고 했다. 또 “용기있게 나서줘 참 고맙다. 과거의 아픔을 잊고 마음 편히 살아 달라”며 안아줬다. 김영훈 5·18민주화운동 유족회장은 “유족들을 대표해 용기 있게 고백을 해줘서 감사하다”라고 위로했다.
광고 로드중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