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써 한일 간 경제 전쟁이 확전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미국의 중재 노력도 무위로 끝났습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이번 조치를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으로 간주하고 맞대응을 천명했습니다. 일본은 수출 규제 명분으로 ‘안보상의 이유’를 내세우지만 어떠한 증거도 내놓지 않았고 국제사회의 검증을 받자는 우리 측 제안에도 묵묵부답입니다.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배제한 마당에 군사안보 신뢰를 바탕으로 맺어진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유지할 명분은 약해졌습니다.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 판결을 문제 삼은 것도 논리가 빈약합니다. 일본은 과거 중국에 대해서는 개인 청구권의 효력을 인정하고 일본 기업의 배상을 묵인한 전례가 있습니다. 독일도 2001년부터 7년간 강제징용 피해자 170만 명에게 정부와 기업이 기금을 마련해 배상했습니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 외교보호권을 소멸시키긴 했지만 개인 청구권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는 우리 사법부의 판단은 국제사회의 관례와 일치합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해서만 다른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은 숨겨진 의도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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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을 규제하는 경우는 있지만 상대국의 산업에 피해를 줄 의도로 수출을 규제하는 건 흔치 않은 일입니다. 한국이 일본에 대해 반도체 등 주요 상품의 수출을 규제한다면 일본의 전자산업에 미칠 피해도 상당할 겁니다. 일본의 소재 산업 역시 한국 수출 길이 막혀 손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쌍방의 경제적 피해는 물론이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 가능성까지 불사하면서 일본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는 저의가 무엇일까요? 우선 우리 경제에 직접 타격을 주어 첨단 산업의 발전을 조기에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아가 일본의 개헌 야욕이 숨어 있다는 견해도 설득력을 갖습니다. 개헌을 통해 일본을 전쟁 가능한 국가로 만드는 것이 아베의 오랜 숙원이기 때문이죠. 한국과의 갈등을 증폭시키면 보수 우익 세력을 결집해 개헌 국면을 유리하게 이끄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전쟁 가해자 일본은 과거를 잊고 싶은 모양이지만 방법이 잘못됐습니다. 역사적 과오는 미화할 게 아니라 반성해야 할 일이고, 상처는 덮을 게 아니라 치유해야 할 문제입니다. 8·15 광복절을 앞두고 아베의 폭주를 지켜보는 마음이 결연해집니다.
박인호 용인한국외대부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