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공무원으로 근무하면 항상 언어를 조심해야 한다. 민원인을 대할 때는 언제나 책임질 수 있는 말만 해야 하고, 보고서 쓸 때는 애매한 문구 없이 명확하게 써야 한다. 이 일을 하면서 많은 어휘 및 용어를 배우게 됐다. 억지로 잊은 단어도 있었다. 서울시에서 외래어 순화 캠페인을 추진하고 있어 내게 사용하기 쉬운 여러 영어에서 도입된 단어 대신 순 한국어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영어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카페나 축제의 이름, 광고, 간판, 기업 구호 등 한국의 거리에서 영어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영어가 모국어인 외국인의 입장에서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문법이나 어휘가 어색한 것은 물론이고 한국어를 소리 나는 대로 로마자로 표기한 경우도 있다. 더 지독한 상황은 아이들까지 입는 티셔츠에서 비속어 및 부적절하고 불쾌한 음란 문구를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이런 현상이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뉴스가 있었다. 화제가 되고 있는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영어 자막이다. 그동안 한국 영화에도 영어 자막은 있었는데 왜 유독 이번 자막의 역할이 컸다는 걸까?
기생충의 자막에는 한국 영화에 열정을 가진 미국인 달시 파켓이 있었다. 그의 첫 한국 영화 리뷰를 본 것은 2000년대 초로 기억한다. 다른 리뷰어들과 비교해 그의 리뷰는 조금 더 논리적이고 일관성이 있을 뿐 특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국 영화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고, 그를 만났을 때마다 전문성이 조금씩 더 커져가고 있음을 느꼈다. 지금은 부산에서 영화를 가르친다. 그는 기생충 자막을 만들며 대사 한 줄, 한 단어를 고심해 번역했고 어떻게 하면 더 자연스럽게 영어로 표현할 수 있을지 여러 번 검토했다.
영화를 예로 들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이렇게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외국인들은 한옥을 사랑하는 로버트 파우저 교수를 비롯해 꽤 많이 있다. 뭐, 사실 우리 한국블로그 칼럼니스트 5명도 이 안에 포함시켜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한국 문화를 알리는 비밀이 숨어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영화자막을 비롯한 책 등 한국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콘텐츠는 원어민 감수는 고사하고 그저 로마자로 써있는 것이 전부인 것들이 아주 많다. 어떤 사람들은 영어처럼 보이면 만족하는 것 같다. 감수시키더라도 한국어가 능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요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좋은 영어로 돼 있더라도 한국어 원본과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글로 쓰여 있어도 문법과 뜻이 맞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듯이 로마자로 써있어도 이해할 수 없으면 외국인에게 뜻이 전달되지 않는다. 한국 문화를 알린다며 사명감에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한국 문화에 부끄러울 정도의 글도 많아 차라리 그런 자막이나 책은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폴 카버 영국 출신·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