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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석 칼럼]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

입력 | 2019-04-17 03:00:00

남의 불행에 쾌감 느끼는 사람들… 과거 역사에 대한 집단 이지메
갈수록 살기등등한 운명공동체… 총체적 모욕, 총체적 否定만연
미세먼지보다 더 치명적 폐해




고미석 논설위원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귀.’ 마스터스 골프대회 우승으로 세계랭킹 1199위에서 1년여 만에 6위로 상승한 타이거 우즈의 부활에 환호가 쏟아진다. 20대 천재 선수로 추앙받다가 불륜 이혼 약물 도박 부상 등 온갖 악재로 추락한 채 나이 든 40대 골퍼.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도무지 터널의 끝을 알 수 없던 우즈가 세간의 예상을 깨고 반전 드라마를 펼쳐 보였다. 그의 추락에서 느꼈던 충격적 실망을 덮을 만큼 빛나는 감동을 골프와 무관한 이들에게도 선사한 것이다.

스스로의 잘못된 선택과 통제 불능의 상황이 겹치면서 좌절의 늪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황제의 귀환’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교훈을 얻는다. 한 인간의 생애 중 특정 대목에만 초점을 맞춰 삶 전체를 함부로 재단할 일은 아니라는 깨달음도 그중 하나다. 인간은 신이 아니고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노력하면 새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 스포츠도 삶도 끝날 때까지는 끝이 아니다. 따라서 찬사든 비난이든 한 면에만 매달려 섣부른 평가를 내리는 일은 삼가야 할 터임을. 만약 우즈가 남을 헐뜯는 기쁨에 취한 이상한 공동체에 몸담았으면, 지금처럼 당당하게 일어설 수 있었을까 의문이다.

지하철역 게시판에서 눈에 띄는 글귀를 만났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에 대한 손봉호 고신대 석좌교수의 짧은 글이었다. 독일어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다른 사람의 불행에 쾌감을 느끼는 것을 뜻한다. 특히 잘나가는 사람이 불운을 겪었을 때 드는 통쾌함이다. 우리말로는 딱히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 그 이유에 대한 손 교수의 분석이 날카롭다. 서양인이 감지하는 이런 비겁한 마음이 한민족에게는 없어서가 아니라 되레 이런 마음을 감추려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내 안에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과감히 이를 고백할 때, 비로소 고쳐야 한다는 자각과 현실 개선도 가능하다는 통찰이다.

현대 한국에 갈수록 ‘샤덴프로이데’가 만연하는 듯하다. 가족의 일탈이 공적으로 일파만파 확대되면서 곤경에 빠졌던 재벌 회장의 비극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미명 아래 사회 전체가 훈육 주임인 양 흠집거리를 들춰내고 질책하는 일이 되풀이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을 마구잡이로 짓밟고, 사회 갈등을 치유하기는커녕 그 골을 더 깊게 만드는 게 아닌지는 관심 밖이다.

사고든 재난이든 뭔 일만 생기면 속으로 ‘옳다구나’ 쾌재를 부르면서 상대 공격의 빌미로 삼는 정치권 행태는 말해봤자 마이동풍일 테고, 오랜 세월 그를 학습했음인지 국민도 그를 닮아가는 구석이 있다. 무슨 원한이 그렇게 쌓였는지 권력의 분노는 과거로도 치닫고 있다. ‘친일잔재 청산’의 명목 아래 온 사회가 호들갑을 떠는 모습에 대해 최근 고국을 찾은 호주 이민자 부부는 이렇게 평가했다. “후손들의 무례하고 불손한 집단 이지메를 보는 듯하다”고. 이 좁은 땅에 운명공동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현실도 모자라 왜 과거까지 눈을 돌려 불화와 반목의 씨앗을 쏟아내는지 모르겠다는 개탄이었다.

“국가적 성취를 폄하하는 것은 우리 자부심을 스스로 버리는 일”이라고 대통령은 최근 국무회의에서 말했다. “우리가 이룬 역사적 성과를 바탕으로 긍정적인 사고를 가질 때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이며. 말은 다 맞다.

개인이든 역사든 잘잘못은 차고 넘친다. 그래서 인간이고 역사다. 그런데 그 잘잘못을 가리는 말과 태도에서 사회의 품격이 드러난다. 그 출발점은 옹졸한 보복이나 복수심이 아니라, 서로를 역지사지 심정에서 대하는 상호존중이어야 한다.

지금의 살기등등한 모습이 한국 사회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인가. 총체적 모욕과 총체적 부정이 이대로 굳어져도 괜찮은 걸까. ‘천하를 안정시키는 일은 미천한 보통사람도 함께 책임이 있다’고 청나라 학자 고염무는 말했다. 평범한 개인도 나라가 망하는 길로 가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얘기다. 누군가를 지목해 닦달하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과거에 원망 섞인 삿대질을 하면서, 정략의 도구와 일상의 카타르시스를 취하는 습관은 언젠가 값비싼 대가의 공동청구서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자손은 조상을 원망하고, 후진은 선배를 원망하고, 우리 민족 불행의 책임을 자기 이외로 돌리려 하니, 왜 남만 책망하시오.”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안창호 선생이 한 말이 아직 백 년도 지나지 않았다. 미세먼지보다 사회의 공기에 더 치명적일 비틀린 정서가 공동체의 뿌리를 좀먹고 있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