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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현장칼럼/서영아]정치가 악화시킨 한일관계, ‘경제’만으로 풀 수 있을까

입력 | 2019-04-17 03:00:00

지한파 일본인들의 속내 속으로




“경제 교류는 정치와 다르게 봐야 한다. 경제 교류가 활발해지기를 바란다.”

서영아 논설위원

지난달 28일 청와대에서 열린 외국인 투자기업 간담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한일관계를 우려하는 일본 기업인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통령으로부터 오랜만에 듣는 전향적 표현이었지만 악화된 한일관계가 이미 경제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운 현실인 데다 ‘남의 얘기하듯’ 하는 화법에 대한 지적도 적지 않았다.

문 대통령에게 질문을 던진 사람은 서울저팬클럽(SJC) 모리야마 도모유키(한국 미쓰이물산 대표) 이사장. SJC는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모임으로 산하에 400여 기업법인을 회원으로 두고 있다. ‘사상 최악’이라는 한일관계는 한국에서 일하는 일본 기업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 한국 내 日기업인들의 불안과 걱정

한일 관계의 현주소는 일본 기업인들에 대한 인터뷰 요청을 하면서도 실감할 수 있었다. 모두가 “(한일) 어느 쪽에서건 욕을 먹게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처음에는 응하겠다고 했다가 다음 날 생각이 바뀐 사장도 있었다. “한국인 직원들이 ‘공연히 주목받으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고 걱정하더라”고 했다.

강제징용 소송의 대상이기도 한 중공업회사 서울지점장인 A 씨(50대)는 “재판 결과가 50여 년 전 국제협정을 무효로 돌리려 한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며 “만약 우리 회사에 소장이 정식으로 와서 압류와 강제징수 절차에 돌입한다면 본사 차원에서 즉각 한국에 대한 국가 리스크를 재산정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국가 리스크는 글로벌 기업이 해외 투자 시 평가하는 특정 국가의 정치적 대외신인도. 이 경우 한국은 분쟁국가 수준의 리스크 국가로 분류될 가능성이 크다고 A 씨는 전망했다.

서울 근교에 공작기계부품 생산회사를 설립해 30년 이상 사장직을 맡아온 B 씨(70대)는 “요즘 한국은 국가로서의 일관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신생국가처럼 군다면 국제사회가 어떻게 상대할 수 있겠느냐는 주장이다. 부쩍 심해진 반일 기류에도 걱정이 많다. “나를 제외한 전 직원이 한국인인데, 이들도 위축되고 있다”고 전한다. 40대부터 한국에서 일하며 모범납세기업 표창도 여러 차례 받았다는 그는 “우리 세대가 조금이라도 도움 되는 일을 해두면 아들 손자 세대에는 양국 간에 더 나은 관계가 될 것이라 기대했지만 요즘 허무감이 많이 든다”고 토로했다. 그는 지난해 ‘한국 정부에 세금 많이 내기 싫어’ 직원 80여 명에게 연말 보너스를 1600%씩 안겨줘 버렸다고 했다.


○ 2012년후 급속히 준 日의 한국투자

한국에 대한 일본 기업의 투자는 양국관계의 부침(浮沈)에 따라 오르내렸다. 정점은 2012년의 45억 달러. 그해 8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독도 방문에 이어 ‘일왕 발언(일왕이 한국을 방문하려면 독립유공자들을 찾아가 사죄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이 알려지면서 한일관계에 치명타가 됐고, 투자액은 이듬해 26억 달러대로 폭락한 뒤 지난해 13억 달러를 기록했다. 2월 문희상 국회의장이 “‘전범의 아들’ 일왕이 직접 위안부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한 발언은 일본인들을 완전히 돌아서게 했다. 이런 험악한 분위기의 결과는 올해 말에나 숫자로 나올 터다.

물론 투자 감소의 요인은 좀 더 복잡하다는 분석도 있다. 한 대기업 간부는 “일본이 수십 년 전 미국 유럽에 투자하던 것을 한국 중국으로 옮겼듯 요즘은 이를 동남아나 아프리카로 돌리는 측면도 있다”고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올 초 내놓은 한중일 각 100개사의 경영자 설문조사에서는 일본 기업들이 한국을 떠나 중국으로 옮기는 양상이 두드러졌다. 특히 2019년도에 설비투자를 늘릴 대상국을 묻는 질문에 “한국”이라 답한 일본 기업은 한 군데도 없다.

○ 日은 한국때리기, 韓은 일본 ‘패싱’

지금까지 한일 간에는 수없는 도발과 반응이 있었지만 이번엔 양상이 좀 다르다. 과거 일본이 도발하고 한국이 화내는 구도였다면 이번에는 한국에서 분쟁 요인이 터져 나오고(강제징용 판결 등) 일본이 반발한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는 한국 ‘배싱’(bashing·때리기)이, 한국에서는 일본 ‘패싱’이 진행 중이다. 이런 갈등의 밑바탕에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2012년 말 재집권에 성공한 뒤 과거 일본이 국제사회에 해온 사과와 반성인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 재검증을 하고 헌법 개정을 추진하는 등 우경화의 길을 걸어온 것이 깔려 있다.

일본에서는 3월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가 경제 보복을 거론하기 훨씬 전부터 “한국에 경제 보복하자”거나 “단교(斷交)하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지식인들이 보는 월간지 분게이슌주(文藝春秋) 4월호가 ‘한일 단교 시뮬레이션’을 특집기사로 실었을 정도다.

전직 외교관과 교수, 자위대 간부, 경제인, 언론인이 함께 점검한 분야별 시뮬레이션 결과는 “(일본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것. 경제 제재를 한다면 한국에 피해를 주는 만큼 일본도 피해를 본다. 일본 정밀부품 메이커들은 삼성과 LG가 주요 납품처이고 양국은 서로 3대 교역 상대국이다. 양국 경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어 그 구조를 파괴하는 데서 오는 피해액은 계산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다는 결론이다.

일본 내에서는 양국관계가 삐걱대는 이유로 ‘한국의 성장’을 지적하는 전문가도 있다. 기무라 간(木村幹) 고베대 교수는 “한국의 정권이 지지율을 높이려 대일 비판을 한다는 시각이 적지 않지만 너무 거기 갇히면 안 된다”고 지적한다. 한국 경제가 커져서, 일본에 대한 관심이나 의존도가 저하했기 때문에 대일 정책을 가볍게 취급하는 점도 있다는 것. 다만 경제 성장에 걸맞은 행동양식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 따라온다.

한국에서 40년을 거주한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 산케이신문 객원논설위원은 “일본의 가장 큰 불만은 문재인 정권 이래 한국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자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그 바탕에는 문재인 정권의 일본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 근본적으로는 한국은 식민지배 피해자니까 일본에 대해 ‘마구 대해도 괜찮다’는 의식이 남아 있는 탓이라고 분석한다.


○ 한미일 3국 공조도 혼란

악화되는 한일관계는 외교안보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무엇보다 한일관계가 삐걱대면 한미일 관계도 어려워진다. 미국으로부터 한미일 안보협력을 위해서도 한일관계를 개선해 달라는 신호가 자꾸 오는 이유다.

한반도는 중국 러시아의 대륙세력과 미국 일본의 해양세력이 충돌하는 각축장이다. 누구와 제휴해 강자에 대항할 것인가는 불가피한 선택지다. 한국이 북한만 바라보는 사이 중국과 일본은 2012년 센카쿠 갈등 이후의 대립관계를 풀고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방일을 앞두고 있다. 국제사회는 철저히 실리를 챙기는 각축장인 것이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일본 정부는 돈(경제)을 내고 외교관계(정치)가 성립됐다. 지금 세계는 북한 핵(정치)를 포기시키기 위해 경제제재(경제)를 한다. 정치와 관계없이 경제만 잘 된다는 건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얘기다.

다행히도 재계를 중심으로 한일 관계개선을 위한 노력에 시동이 걸렸다. 전경련은 15일 한일 긴급 좌담회를 열고 정부와 기업이 참여하는 재단 설립을 통한 법률적 화해 추진 등 관계정상화를 일본 측에 제안했다. 5월 일본은 레이와(令和)를 연호로 하는 새 일왕시대가 열리고 6월에는 오사카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있다. 경제인들의 노력을 헛되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조만간 정치가 나서야 할 순서다.

서영아 논설위원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