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혹·논란 근처도 안 갔어야’…명예·권위 없는 야만의 시대
이명건 사회부장
지금 한국은 어떤가. 자극에 훨씬 무디지 않나. 로맹 가리가 그 원인으로 지목한 마약, 성폭행 등의 강력범죄가 극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언급하지 않은 것 중 한국 사회를 배회하며 자극 사회를 더 자극하는 게 있어서다. 바로 배신이다. 특히 공직자의 배신이다.
“김 선배가 그럴 줄 몰랐다. 배신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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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배신감은 선후배, 동지, 친구처럼 신념이나 경험, 기억을 공유하는 두텁고 끈끈한 관계에서만 생기는 건 아니다. 많은 국민은 공직자의 비위, 부도덕에 배신감을 느낀다. 비록 얕고 성긴 관계지만 말이다. 선출직이건, 임명직이건 나를, 우리를 대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임금이 세금으로 지급되는 걸 용인하는 것이다.
이미선 헌법재판관 후보자 부부의 35억 원 주식 투자 문제도 관건은 국민의 배신감이다. 위법 여부가 아니다. 그 판단은 자유한국당의 고발로 검찰이 하게 됐다. 수사 결과에 따라 최종 결론은 법원이 내릴 수 있다. 그런데 이 후보자 남편은 주식 투자에 대해 △나 혼자 다 했고 △이 후보자 명의로 한 건 재판과 무관해 위법이 아니며 △내가 판사일 때 한 것도 적법하다고 공개적으로 페이스북 등을 통해 주장했다. 모두 사실일지 모른다. 청와대와 여당도 위법이 없으니 재판관 임명에 문제가 없다고 강조한다. 이 후보자는 자신 명의 주식을 다 매각했다.
하지만 임명 반대 여론을 돌려세우기엔 늦었다. 많은 국민은 배신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판사 부부가, 사법부 공직자가 거액을 주식에 투자하면서 판결 관련 의혹이나 위법 논란이 불거질 소지를 인식하지 못한 자체를 배신으로 느끼는 것이다. 의혹이나 논란 근처에도 가지 않길 바란 것이다. 이스라엘 히브리대 아비샤이 마갈릿 명예교수는 저서 ‘배신’에서 “중요한 것은 상처를 주려는 의도가 아니라 피해자에 대한 무관심, 즉 배려의 부족이다. 정말 모욕적인 부분은 배신당하는 쪽에서 배신자가 자신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 후보자 부부가 나를, 우리를 배려하지 않았다’는 게 바로 국민 배신감의 실체다. 공직자로서 국민이 어떻게 느낄지 살펴 자중하지 못한 게 헌법재판관 자격 미달 요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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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국민 다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에서 거대한 배신을 겪었다. 여기에 김 전 대변인 투기 논란, 이 후보자 부부 주식 투자 문제 등 공직 배신이 중첩돼 자극 사회의 둔감이 심화되고 있다. 그 결과가 로맹 가리의 분석처럼 ‘명예’ 퇴색이고 ‘권위’ 추락이다. 공직의 기둥은 상가 건물도, 주식도 아니다. 명예와 권위다. 이러다가 명예도, 권위도 없는 야만의 시대를 살게 될까 두렵다.
이명건 사회부장 gun4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