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양평물맑은시장은 1919년 대규모 만세운동이 열렸던 갈산장터다. 2016년 이곳에서 3·1절 기념행사 참가자들이 만세운동을 재현했다. 양평군청 제공
동아일보 1926년 11월25일자 2면에 ‘이신규씨 장서(長逝)’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스물일곱 살 청년의 부음 소식이었다. 그는 7년 전 경성지방법원 경사부의 징역 선고를 받고 3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재판기록에 따르면 정치에 관하여 많은 군중과 함께 불온 행동을 함으로써 경기도 양평군의 안녕을 방해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 치밀한 작전, 갈산장터 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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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7일 만세운동이 벌어졌던 양평군 양동면 양동만세공원의 표지석. 양평문화원 제공
하지만 실제로는 치밀한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양평에서의 첫 만세운동을 치르고 경험을 얻은 서종면 젊은이들이 양평 각지의 주민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장날인 3월24일에 장이 서는 갈산면(현재의 양평읍)에서 대규모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전날인 23일엔 청운면과 단월면에서 광목에 ‘조선독립기(朝鮮獨立旗)’라고 쓴 깃발을 든 200여 명이 합동 시가행진을 하기도 했다.
3월24일 갈산장터의 만세운동은 조직적이었다. 운동의 본부는 양평 중서부에 있는 칼산에 두었고, 양평 각지의 주민들이 긴밀하게 연락해서 임무를 나눴다. 떠드렁산과 역전 뒷산, 군청 뒷산에 잠복한 사람들은 읍내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기로 했다. 만세운동을 피해 도망가려는 사람을 발견하면 징을 울리도록 했고, 이들을 향해 돌을 던져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는 대기조도 있었다. 장원석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설명에 따르면 “연합으로 이뤄진 운동”이었다.
1919년 4월7일 만세운동이 벌어졌던 양평군 양동면 양동만세공원에 세워진 기념비. 양평문화원 제공
‘지금에 각 경찰서에서 형벌을 당하는 형제자매를 미련한 무리처럼 보고, 또 태황제(고종) 폐하를 암살하였다. 2천만 동포는 나라 없고 임금 없는 백성이 된 지 이에 120년의 능역을 당하였다. 나라 없는 노예가 되어 사는 것보다는 오히려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총·칼 밑에서 죽는 것만 못하다. 독립의 시기는 왔다. 이 시기를 놓치면 다시는 만나기 어렵다. 맹렬히 분기하여 민족자결을 하고 독립기를 높이 게양하여 형별 속에 있는 형제자매를 구하고 역적의 무리를 잘게 토막쳐 우리들의 마음속을 상쾌하게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우리 동포여! 이시기를 놓치지 말고 독립기를 번득이고 맹렬히 분기하여 독립하라.’ 장터에 모인 1000여 명의 사람들은 한 손에 뜨거운 문장으로 가득한 격문을, 다른 한 손에 태극기를 받아들었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군중의 함성이 절로 터져 나와 장터에 울려 퍼졌다.(‘독립운동사 2권 3·1운동사’,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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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이신규와 곽영준(1899~1932), 스물한 살 한봉철(1898~1936), 스물세 살 한창호(1896~?). 모두 갈산 장터에서 ‘양평군민들을 선동하여 많은 군중들과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했다’는 죄목으로 징역형을 받은 이들이다. 20대 청춘들이 앞장서서 불을 지른 것은 양평 만세운동의 도드라진 지점이기도 하다. 이렇게 분출된 양평 3·1운동은 2만1000명 이상 참여하면서 강상면(3월29일), 용문면(3월30일), 강하면(3월31일), 양서면(4월1일), 고읍면(현재 옥천면·4월3일), 양동면(4월7일), 지제면(현재 지평면)과 개군면(4월11일)으로 이어졌다. 당시 양평인구는 6만9000여 명, 호수는 통계상 1만3000호였다. 집집마다 1명 이상 참여한 셈이다. 82명이 검거되고 사상자가 다수 발생하는 등 시위는 매우 치열하게 펼쳐졌다.
열혈 청년들도 눈부셨지만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노익장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대한제국군 오위장(五衛將· 입직(入直)과 행순(行巡:도성 내외를 순찰하는 일) 및 시위(侍衛) 등의 임무를 수행하던 오위의 으뜸벼슬) 출신이었던 최대현(1862~1931)이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그는 의병을 일으켜 부하 700여 명을 거느리고 경기도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다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3월31일 고향인 양평군 강하면 사무소 앞에서 면민 300여 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음날엔 양서면 도곡리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부근에 모인 2000여 명과 함께, 4월 3일엔 강상·강하·양서·고읍 4개 면 주민 4000여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할 때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했다. 그는 이후 군중을 이끌고 옥천면 옹암리와 용암리 사이의 언덕까지 행진하는 등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됐다. 일흔에 가까운 노령이었음에도 4개 면을 넘나들면서 만세운동을 벌인 것이다. 특히 양서면에서의 독립만세운동 때 함께 했던 아들 최윤식이 일제 경찰의 총격을 받고 세상을 떠났지만, 최대현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양평3·1운동사’).
● ‘응답하라 1919’
100년 전 1000여 명의 군중이 목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던 양평읍 장터에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모였다. 윤기영의 손자인 광복회 지회장 윤광선 씨, 여광현의 손자 여학구 옹, 변준호의 손자 변도상 3·1운동기념사업회장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고 있다. 양평=김재명기자 base@donga.com
변 회장의 조부는 독립운동가 변준호(1895~1966)다. 고국에서 3·1운동이 벌어졌을 때 변준호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독립운동 지원 단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내와 아들을 고국에 두고 유학을 떠났다는 조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귀국하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사실을 1993년 의정부 보훈지청을 통해 처음 들었어요. 광복 뒤 미군정의 정책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돌아오지 못하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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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터에서 만난 여학구 옹(87)은 16대째 양평에서 살아왔다고 밝혔다. 그의 조부는 여광현(1885~1962)으로 강상면과 옥천면, 양서면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던 독립운동가다. 여광현은 몽양 여운형의 친조카다. 여운형의 고향인 양평에는 그의 친척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여운형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여광현과 여운긍 등은 양평 곳곳을 다니면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태형을 선고받았다. 여학구 옹은 어렸을 적 늘 병석에 누워 있던 할아버지를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양평은 3·1만세 100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면서 100년의 기억을 차근차근 되짚고 있다. 지난해에는 ‘응답하라1919’라는 제목을 내건 마중사업으로 세 차례에 걸쳐 강연회를 개최했고, 청소년 대상 3·1운동 기념동영상 공모 사업도 열었다. 올해엔 2월23일 양평문화원에서 ‘양평의 근대, 3·1에서 만나다’를 주제로 몽양과 양평의 만세운동을 관통하는 역사적 맥락을 짚는 포럼을 개최한다. 3·1절 행사로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카퍼레이드와 함께 설치미술과 퍼포먼스, 연극 등 만세운동을 소재로 한 예술 무대가 펼쳐진다. 4월3일 양평 장터에선 3·1만세 횃불제가 열린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