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살인사건/김호 지음/400쪽·2만2000원·휴머니스트
조선 말기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의 ‘살인에 검시하는 모양’.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100년 전 살인사건’은 서울대 규장각 소장 검안 문서를 바탕으로 조선의 일상사를 들여다본다. 휴머니스트 제공
1904년 경북 문경군에서 ‘상놈’에게 겁탈당한 양반 여성 황씨가 목을 매 숨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문경군수 김영연은 사인(死因)을 규명하는 데 필요한 사항이 서술된 법의학서 ‘증수무원록언해’에 따라 황씨 시신을 검시했다. 시신은 피부가 붉고 푸르게 얼룩덜룩했고, 목 졸린 흔적이 ‘일(一)’자였을 뿐 아니라, 줄이 매였던 서까래의 줄 자국이 어지럽지 않고 먼지 위에 한 줄로 선명했다. 증수무원록언해에 따르면 이런 경우는 구타당한 뒤 목 졸려 살해당한 것. 군수가 이런 증거를 바탕으로 다그치자 남편 안재찬은 범행을 실토했다. 조선 과학수사의 위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늘날과 비교하면 책에 등장하는 여러 죽음은 ‘명예’와 관련된 것이 적지 않다.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인 저자는 살인사건을 통해 당대 평민들의 심성(心性)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1899년 충남 서산군에 살던 유씨 부인의 유서다. 그는 남편의 삼년상을 치르는 도중 행실이 나쁘다는 악의적 소문이 돌자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독을 마셨다. 유서는 자신이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적 없다”고 항변한다. 당시 여성들은 ‘정조를 잃었다’는 소문에 격분하지 않으면 짐승만도 못하다고 질타당했고, 격분하면 편협하다고 손가락질 받았다. 음란하다고 비난받은 여성이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 여성들은 ‘이중의 질곡’에 시달렸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조사관이 시신의 상태를 기록하는 ‘시장도’. 서울대 규장각 소장. 휴머니스트 제공
취조 기록인 공초(供招)에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지 못했던 평민과 부녀자의 목소리가 오롯이 담겨 있다. 하지만 혹시 과거 관청에서 문초(問招)를 받던 이들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당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자임을 실제보다 더 강조했던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오늘날 피의자로 조사를 받는 이들이 ‘성실한 납세자’임을 강조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말이다.
우국지사인지 탐관오리인지 헷갈리는 한 군수의 죽음, 동학교도의 복수와 그로 인해 아버지를 잃은 아들의 복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사통(私通)했다는 누명을 씌우다 벌어진 살인 등 여러 사건이 이어진다. 갈래를 치기 쉽지 않을 정도로 뒤엉켜 있지만 이를 통해 조선 시대 보통 사람들 일상의 기쁨과 슬픔, 놀라움과 두려움을 관찰할 수 있다. 상당수가 금전문제나 치정이 발단이 돼 벌어지는 오늘날 범죄 사건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점도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