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전문회사에 입사한 첫 날, 부장님은 제게 ‘행사 의전 기본 매뉴얼’이라고 적힌 책 한 권을 건네셨습니다. 장편소설 한 권 분량의 이 문서에는 ‘귀빈’의 서열판단 기준부터 안내방식, 자리배치는 물론이고 꽃장식의 방향까지 적혀 있더군요.
“요즘 이런 걸 따지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이 매뉴얼을 꼭 따라야 해요?” 부장님께 ‘유연한 의전’을 건의하자 바로 불호령이 떨어졌어요. “자네 미국사람이야? 한국에서 이런 걸 지키지 않으면 일감 끊기는 건 시간문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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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졸업생 박지훈(가명·32) 씨는 일찍이 20대에 ‘의전의 달인’이 됐다. 연구실 조교 생활을 하며 ‘교수님 의전 매뉴얼’을 완벽히 익혔기 때문이다. 박 씨는 “한국의 대학원생에게 연구보다 중요한 게 교수님을 잘 모시는 것”이라며 “교수님이나 그 가족들 공항에서 태워오기, 자녀 숙제 돕기, 교수님이 좋아하는 간식 준비하기 등은 기본”이라고 말했다.
국내 유명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 씨(38)는 입사 당시 받은 충격을 잊지 못한다. 선배들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일명 ‘손가락 주걱 신화’를 들려주며 의전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기 때문이다. 손가락 주걱 신화란 윗사람이 구두주걱을 찾는데 보이지 않자 자신의 손가락을 상사의 구두 속에 넣은 직원이 훗날 임원으로 승승장구했다는 이야기다. 김 씨는 “이런 얘기가 어처구니없었지만 현실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게 더 충격적이었다”고 했다.
해외 주재원들의 업무는 ‘절반이 의전’이라는 말도 있다. 유럽 지역 주재원이었던 박모 씨(32)는 “입맛이 까다로운 임원의 방문을 앞두고 한 끼 식사를 위해 식당 3개를 동시에 예약한 적이 있다”며 “예약을 취소하면 패널티가 있어 나머지 두 식당에는 직원들이 갔다. 의전을 위한 낭비되는 비용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을 보며 조깅을 하고 싶다는 한 대기업 부사장을 위해 현지 직원이 호텔 객실에 트레드밀(러닝머신)을 설치했다는 일화는 주재원 세계의 전설로 통한다.
과잉 의전이 여전히 극성을 부리는 곳은 정계와 관가다. A국회의원실에서 일하는 강주희 씨(가명)는 황당한 의전 경험을 숱하게 겪었다. 최근 중요한 현안을 두고 전문가 토론을 열었는데, 토론이 한창일 때 한 국회의원이 지각 입장을 했다. 그러자 사회자는 “귀한 발걸음 해주신 의원님의 인사말 듣고 다시 토론을 이어가겠다”며 토론을 중간에 싹둑 잘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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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화로 행사의 주객이 전도되는 일은 흔하다. 매년 열리는 한 시상식을 기획하는 최모 씨는 “시상식의 주인공은 수상자들이어야 하는데, 행사 때마다 가장 힘이 드는 건 ‘내빈 의전’”이라며 “초청 순간부터 주차장에서 행사장까지 동선이나 내빈 호명 순서 등을 묻는 VIP 비서들의 전화에 응대하느라 다른 업무를 하지 못할 정도”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 전반에 뿌리 내린 과잉 의전 문화가 조직에는 물론이고 의전을 받는 당사자들에게도 ‘독’이 된다고 지적했다. 본인도 모르게 타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갑질 인사’로 전락할 수 있어서다. 과잉 의전을 받다 은퇴하면 적응에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고위직을 지낸 이모 씨는 “퇴직하고 나니 내 비행기표 한 장 예매하기도 힘들더라”고 말했다.
‘의전의 민낯’이란 책을 쓴 허의도 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무총장은 “아랫사람이 먼저 과잉 의전을 없애기 힘든 만큼 윗사람이 먼저 폐단임을 인식하고 달라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올해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내빈 축사 및 소개 생략’ ‘자율배석제’ 등을 통해 행사에 필요한 의전을 최소화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기업들도 임원 의전을 줄이는 추세다. 해외출장이 잦은 회사로 이직한 장기원(가명·34) 씨는 “전 직장과 달리 ‘임원 동행 출장 시 각자 체크인 뒤 현지 공항에서 만남’이란 문구를 명문화해 놓은 것을 보고 놀랐다”며 “짐 옮기기, 체크인, 면세점 쇼핑 보조 등 업무와 상관없는 의전이 줄다보니 업무에 더 집중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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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연 기자 sy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