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학자·서울대 명예교수
인간은 호기심의 동물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화와 문명은 호기심의 결과물입니다. 선량한 호기심은 어린이를 미래의 학자, 발명가, 인권운동가로 이끕니다.
문제는 악의에 찬 호기심입니다. 오래전에 목격한 대한민국 서울의 동네 목욕탕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서양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엿보는 톰(peeping Tom)’이라는 말의 기원은 18세기였다고 하는데 인터넷 검색어로 쓰면 아직도 수많은 자료가 뜹니다.
‘엿보는 톰’이 정신건강의학과에 온다면 진단은 관음증(觀淫症)입니다. 관음증은 “변태 성욕의 하나로서 다른 사람의 알몸이나 성교 행위를 훔쳐봄으로써 성적(性的) 만족을 얻는 증세”입니다.
일회성 훔쳐보기가 늘 안타까웠던 관음증 환자들에게 보관이 가능하고 되풀이해 볼 수 있는 디지털 기법의 등장은 축복이었을 겁니다. 반면 자신도 모르게 관음증의 대상이 된 피해자에게는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사이버 공간에 자신의 은밀한 부분이 노출되어 떠돌아도 무력할 수밖에 없는, 저주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숨 쉬며 살고 있는 세상은 관음증으로 넘쳐납니다. 우선, 영화의 예를 들겠습니다. ‘성인용’이 아니더라도 평소 은밀하게 들여다보고 싶던 장면들이 연이어 나옵니다. 성적인 만족만이 아닙니다. 치고받는 출연자들의 행위에서 공격성도 간접적으로 충족이 됩니다. 성(性)과 공격성은 늘 붙어 다닙니다.
스크린이 아닌 현실인 영화제에 등장하는 영화배우들의 옷차림 중에는 민망해서 고개를 돌려야 할 옷들도 흔히 있습니다. 그래야 개인의 인기도, 시청률도 올라갑니다.
대중매체(검색 포털을 포함)는 이미 성을 도구로 적극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용자들의 관음증적 성향을 만족시키면 수입이 늘어나는 구조입니다. 기사의 자극적인 제목이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을 참기 어렵게 합니다. 잠시만 살펴보아도 ‘꽃미모’, ‘상큼함’, ‘러블리룩’, ‘개미허리’ 등등입니다.
관음증 환자가 스스로 치료를 청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가족이나 사법체계의 요청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만 그 역시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길거리와 이웃집에서 관음증 환자가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을 주시하고 있다고 보아도 큰 무리가 아닙니다.
대도시에 살면 주변에 늘 사람이 넘쳐납니다. 그러니, 창문에는 커튼을 칩시다. 외출을 할 때도 가릴 만큼 가려야 한다고 봅니다. 지나친 노출 역시 정신의학에서는 노출증(露出症)이 아닌지 따집니다. 복잡한 이야기는 논란하지 말도록 합시다. 비록 관음증 환자에게는 환상이 현실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지만 덜 보이면 덜 쳐다봅니다.
정상 행위와 관음증 사이의 경계가 점점 헛갈리게 되는 문화 풍토에서 관음증에 걸리지 않으려면 스스로도 노력해야 합니다.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이드의 충동은 최소화하고, 초자아의 가르침을 존중하며, 자아에게 건강한 조정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대도시에 살면서 다른 사람을 안 쳐다보고 살기는 불가능하니 참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도 휴대전화 화면만 보며 내 앞으로 용감하게 걸어오는 젊은 그림자를 어떻게 덜 보며 피해 갈지 고민하며 길을 갑니다.
정도언 정신분석학자·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