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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철희]높이 5cm 너비 50cm 군사분계선

입력 | 2018-04-27 03:00:00


이철희 논설위원

북한 김정은이 오늘 넘는 판문점 군사분계선(MDL)은 높이 5cm, 너비 50cm의 콘크리트 경계석이다. 당초 판문점은 남북이 유일하게 경계선 없이 공존하던, 말 그대로 공동경비구역(JSA)이었다. 그러나 1976년 8·18 도끼만행사건 이후 MDL을 따라 남북으로 분할됐다. 남쪽에 있던 북한군 초소 4개가 철거되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도 차단됐다. 회의장 건물 구역의 시멘트 경계선도 이때 만들어졌다.

8·18 사건은 6·25전쟁 이후 최초로 전투준비태세 ‘데프콘 3’가 발령된 일촉즉발의 위기를 불러왔다.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에 무자비하게 살해되자 미국은 “북한이 반드시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헨리 키신저 국무장관)며 보복을 별렀다. 박정희 대통령도 “미친개에겐 몽둥이가 약이다”고 일갈했다.

문제의 미루나무를 베어내는 대응 작전에는 100명가량의 부대가 투입됐다. 하지만 그 뒤엔 어마어마한 전력이 동원됐다. 상공엔 헬기 수십 대가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선회했고, 더 높이엔 B-52 전략폭격기가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으며 비행하고 있었다. 멀리 오산기지에선 중무장한 전폭기가 대기했고, 더 멀리 해상엔 미드웨이 항공모함 소속 기동부대가 정박해 있었다. 워싱턴에선 핵폭탄 투하까지 거론했다. 작전 직후 김일성의 이례적인 ‘유감’ 메시지가 나오지 않았다면 전쟁을 피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분단과 대결을 상징하는 판문점은 역설적으로 남북 정상이 한반도 평화를 논의하기에 최적의 장소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북한의 집요한 정전체제 무력화 시도를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하다. 북한은 1990년대부터 정전협정의 효력을 부인해왔고, 2013년엔 협정 백지화를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판문점의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회 기능은 사실상 정지된 지 오래다.

오늘 정상회담에선 비핵화와 함께 평화체제를 논의한다. 금기로까지 여겨졌던 평화협정 체결문제가 남북, 북-미 간 핵심 의제로 논의되는 것은 획기적인 변화다. 그런 만큼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처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디테일의 악마’가 잔뜩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말하는 비핵화는 북한만의 비핵화가 아니라 조선반도의 비핵화, 즉 남북 동시 비핵화다. 그래서 그간 국제적 합의에는 한국의 핵 부재 확인 조항도 들어 있다. 북한이 최근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대신 한국 내 미군 전략자산의 철수와 한미 연합훈련 때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 중지를 내걸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때맞춰 미국이 방위비분담금 협상에서 뜬금없이 전략자산 전개 비용을 요구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 것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북한은 완전한 비핵화에 상응하는 완전한 체제보장을 원한다. 그런 상응조치는 분명 65년 정전체제에 기반을 둔 한미동맹의 근본적 재조정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 내부의 엄청난 논란도 불가피하다. 우리가 그런 변화를 수용할 수 있으려면 북한이 완전 비핵화에 대한 확신을 줘야 한다. 그것이 근본적 전제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넘은 MDL은 경의선 남북 연결도로의 노란 선이었다. 원래 아무런 표지도 없었지만 방북 전 노란 페인트로 굵게 선을 그었다. 그에 비해 김정은이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판문점의 콘크리트 MDL은 역사적, 실존적 무게감이 훨씬 크다. 김정은은 얼마나 무겁게 이 선을 넘을까. 과연 그는 어떤 신뢰를 심어줄 수 있을까.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