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에서 탈출한 뒤 응급구조사가 되기로 결심해 동남보건대 응급구조학과에 재학 중인 장애진 씨가 빈 대학 강의실에 앉아있다. 장 씨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4월이 돌아오면 떠나보낸 친구들과의 추억이 더 자주 떠오른다”고 말했다. 조건희기자 becom@donga.com
‘쿵’ 소리와 함께 배가 기울었다. 컴컴한 물이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배 안엔 단원고 친구들이 아니라 엄마가 있었다. 그 순간 A 씨(21·여)는 땀에 흠뻑 젖은 채 잠에서 깼다. 꿈이라며 스스로를 도닥였지만 질식할 듯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세월호 생존자 A 씨는 지난해부터 이런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참사 직후엔 없었던 증상이다.
● 시간 지날수록 봄이 두려운 세월호 생존자들
이소희 국립중앙의료원 정신건강의학과장과 김은지 마음토닥정신건강의원장(전 단원고 스쿨닥터)은 단원고 출신 세월호 생존자 75명 중 46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위험을 추적한 결과 시간이 흐를수록 없던 증상을 호소하는 등 상태가 악화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15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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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연구에 따르면 PTSD 환자의 절반가량은 사건 후 3년이 지나면 증상이 상당히 사라지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그 반대다. 오히려 일정 시기가 지난 뒤 새로운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人災)의 경우 사건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나 책임자의 태도 등 다른 스트레스 요인이 PTSD를 뒤늦게 악화시킬 수 있다”고 분석했다.
● 시도 때도 없이 닥쳐오는 ‘그날’의 기억
세월호 생존자 B 씨(21·여)는 건물 안에 있다가 바닥이 기울고 있다는 착각 때문에 밖으로 뛰쳐나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항공기나 기차를 탈 때도 마찬가지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것도 괴로워 집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이처럼 일상생활 중 갑자기 사고 당시를 떠올리는 ‘침습(侵襲)’은 PTSD의 대표적인 증상이다.
사람을 구하고 싶어 응급구조사 교육을 받고 있는 장애진 씨(21·여·동남보건대 응급구조과)는 병원 실습 중 심정지 환자의 모습을 본 순간 손이 떨리고 몸이 굳는 경험을 했다. 장 씨는 13일 덕성여대에서 열린 ‘세월호 진상 규명 간담회’에서 자신의 경험을 대학생들에게 담담하게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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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증상이 없었던 C 씨(21)는 지난해 말 직장에 들어갔다. 새로운 환경에서 스스로를 강하게 단련하고 싶었다. 하지만 안전교육 시간에 세월호 침몰 영상을 보는 순간 심장이 쿵쾅거리며 모든 각오가 무너져 내렸다. 당직을 설 때 불을 끄면 컴컴한 물 속으로 뛰어들 때처럼 온몸이 떨렸다. 결국 C 씨는 3개월 만에 직장을 그만뒀다.
생존자뿐 아니라 그 가족까지 우울증과 불안장애에 시달리기도 한다. 퇴사 후 C 씨는 가끔 자신의 방에서 나와 어머니 옆에 누워 소리 없이 울었다. 어머니는 아무 것도 묻지 못하고 어깨만 두드려주며 속앓이를 했다. 이런 날이 반복되면서 C 씨의 어머니는 항우울제를 먹기 시작했다. 또 다른 세월호 생존자 D 씨(21·여)의 어머니는 “‘차라리 그때 죽은 게 나였다면…’이라는 딸의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찢어진다”고 말했다.
● “재난 트라우마에 ‘생애 전 주기’ 지원 필요”
보건복지부는 세월호 참사와 같은 대형 재난에 대응하기 위해 이달 5일 국립정신건강센터 내에 국가트라우마센터를 설치했다. 투입된 예산은 17억 원, 상주 인력은 25명이다. 센터는 재난 발생 시 ‘안심버스’를 보내 1차 상담을 돕고 정신건강 전문인력의 배분과 교육을 총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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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생존자 치료를 총괄하는 고영훈 안산온마음센터장(고려대 안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은 “세월호 피해자뿐 아니라 재난을 겪는 이들이 장기간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생애 전 주기’ 트라우마 관리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건희기자 bec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