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국적 첫 지방변호사회장 백승호씨
외국 국적으로 처음 지방변호사회 회장이 된 백승호 효고현 변호사회 회장.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서울에 살던 백 변호사는 여섯 살 때인 1968년 교통사고로 오른팔을 잃었다. 사업에 실패하고 먼저 일본에 가서 자리를 잡은 아버지 때문에 초등학교 6학년 때 일본어를 하나도 모른 채 일본 오키나와(沖繩)현으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너는 몸이 불편하니 판사가 돼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했다. 공부를 좋아했던 그는 낯선 땅에서 금세 두각을 나타냈고 국립 류큐대에 진학해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1991년 이낙연 당시 동아일보 도쿄특파원(현 총리)이 일본사법시험에 합격했을 때 그를 취재해서 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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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4월 취임 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조직범죄처벌법 개정안(일명 공모죄) 처리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며 거리로 나섰다. 백 변호사는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법에 규정된 변호사의 의무”라며 “정권이 평화헌법 9조를 바꾸려 하면 헌법을 지키기 위해 다시 거리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국적 차별은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하지만 그는 “외국 국적 변호사가 법원의 조정위원이 될 수 없다는 장벽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백 변호사 등이 2003년부터 5번이나 시도했지만 번번이 최고재판소에서 거부당했다. 최근 다소 줄긴 했지만 헤이트스피치(혐한 시위)도 여전한 과제다.
언어, 국적, 장애라는 세 가지 장벽과 맞서 성공을 거둔 그는 세 가지 중 ‘장애’가 가장 넘기 힘들었다고 했다. 그는 “아직 완전히는 아니지만 골프를 치면서 상당 부분 극복했다”고 털어놨다. 사람들 앞에서 한 손으로 치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처음엔 주저했지만 노력 끝에 80, 90대를 치는 골프 애호가로 거듭났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보다 골프 잘 치는 것을 더 평가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하.”
그는 회장이 될 때 ‘국제 교류’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지난달 간부들과 부산지방변호사회를 찾아 우호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그의 인생 역정은 지난달 마이니치신문에서도 대서특필됐다. “자칫 잘못하면 재일동포 변호사 전체 이미지에 누가 될 수 있어 항상 조심스럽죠. 한일 관계에 재일동포 지식인의 존재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미력하나마 주어진 역할을 하고 싶어요.”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