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시설 좁아 레슬링 등 더부살이 훈련”
1966년 6월 29일자 동아일보는 ‘국가대표급 산실 마련’이라는 제목과 함께 태릉선수합숙소 준공 소식을 전했다. 한국 스포츠의 요람이 된 태릉선수촌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본관 사진에 ‘아담하다’는 설명을 붙일 만큼 그 시작은 미약했다.
1972년 7월 남자 숙소 전진관 개관에 맞춰 김택수 대한체육회장이 고급 담요 200장(시가 200만 원)을 기탁했고, 유한양행과 일동제약은 의약품을 전달했다. 대표팀에 대한 주위의 온기가 싹트던 시기였다.
수많은 장소 가운데 왜 태릉이었을까. 대한체육회장으로 태릉선수촌 건립을 주도한 민관식 전 문교부 장관은 1976년 11월 동아일보에 연재한 ‘그때 그 일들’이란 회고록에서 ‘어느 날 아침 불현듯 떠오른 곳이 태릉 일대였다’고 회상했다. 서울 외곽에 뛰어난 풍광을 지녔으며 문화재 관리국 소유지여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등 국내 최초 대표팀 훈련센터 건립에 최적지로 판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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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릉선수촌에 대한 따끔한 지적도 찾을 수 있다. 동아일보는 1983년 1월 선수촌의 비좁은 시설을 보도하면서 유도 대표팀과 훈련장을 나누어 쓰던 레슬링 대표팀이 농구장에 매트를 깔고 훈련하고 있으며, 축구와 하키가 같은 경기장을 사용하는 등 열악한 현실을 전달했다.
훈훈한 미담도 눈길을 끌었다. 1991년에는 개촌 때부터 태릉선수촌과 인연을 맺은 뒤 25년 동안 식당에서 일하다 정년퇴직을 앞둔 여성 주방장의 애환을 담은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그의 급여 수준도 지면으로 확인할 수 있다. 본봉 32만 원과 수당 18만 원을 합해 월 50만 원. 하지만 오랜 세월 ‘선수촌 어머니’로 불린 자부심은 천만금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