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참호전이었다1914-1918/자크 타르디 지음·권지현 옮김/176쪽·1만8500원·서해문집
책 말미에는 저자가 수정판을 내며 추가한 제1차 세계대전 관련 일러스트레이션 50여 장을 실었다. 포화와 시체 구덩이 앞에서 초점 잃은 눈으로 플루트를 연주하는 병사를 묘사한 이 그림은 1998년 제작한 것이다. 서해문집 제공
작가는 서문에서 “나는 오로지 인간, 그리고 인간이 겪는 고통에만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인류가 오래도록 스스로에게 가해 온 고통인 전쟁을 그가 필생의 과제처럼 붙들고 거듭 그려낸 건 당연한 선택으로 보인다.
책장을 넘기는 독자의 신뢰를 구축해주는 것은 소재를 바라보는 작가의 태도다. 긴박함을 과장한 상황 구성, 비장미를 슬쩍 덧칠해낸 잔혹한 살상 장면, 엉뚱한 감상을 유발하는 애잔한 곁다리 에피소드…. 전쟁의 필연성을 은근히 설파하는 것 아닐까 의구심을 자아내는 숱한 할리우드 전쟁영화에서 흔히 보던 요소가 이 책에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다.
작가는 철저하게 원거리 관망이 아닌 눈앞의 흙구덩이 참상 속에 읽는 이의 시선을 붙잡아둔다.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오래전 지구 어디선가 벌어졌던 일’로 여겨지던 막연한 이야기가 그림 속에 숨을 헐떡이며 되살아났다가 피를 뿜으며 사라진다.
서로의 얼굴 표정을 육안으로 바라보는 거리에 참호를 파고 대치한 채 전진도 후퇴도 없는 돌격과 사격을 날마다 거듭하는 병사들. 전장의 성과를 보고하기 위해 진격을 명한 여단장은 집중포화에 못 이겨 후퇴한 병사들이 가득한 아군 참호에 포격을 명령한다. 후퇴한 병사들 중 세 명이 무작위로 호명돼 총살형에 처해지고, 총살 집행은 새로 전선에 배치된 신병들의 신고식이 된다. 어떻게든 그곳에서 벗어날 궁리에 골몰하던 한 병사는 음식찌꺼기가 묻은 실을 바늘에 꿰어 팔에 꽂은 뒤 썩은 팔을 절단함으로써 탈출에 성공한다.
유일하게 참호를 벗어난 공간에서 전개시킨 초반부 장면 역시 전쟁터의 모습 못잖게 참혹하다. 군 총동원령이 내려진 1914년 8월 2일 오후 프랑스 파리. ‘손쉽게 무찌를 독일’에 대한 증오에 흥분한 사람들로 가득 찬 노변 카페에서 한 노인이 홀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킨다. 군중의 살기에 동조하지 않은 그는 금세 첩자로 몰려 땅바닥에 처박힌다.
저자에게 전쟁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준 그의 조부는 “신이 있다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임종을 찾아온 신부의 종부성사 권유를 거절했다. 작가 역시 “어떤 종류의 정권으로부터든지 무엇도 받고 싶지 않다”며 2013년 최고훈장 레지옹 도뇌르를 거부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