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나희덕 지음/208쪽·1만4000원·달
심하게 굽은 들판의 나무 한 그루에서 누군가는 조형미를 느끼고, 또 다른 이는 이 지역의 바람이 거센 이유를 생각하겠지만 저자는 인간이 맞이하는 운명의 흔적을 본다. ‘어두워진다는 것’을 비롯한 여러 시집으로 사랑받아 온 시인의 산문 45편이 책에 담겼다. “그가 그린 어떤 길은 벌목의 상처를 지니고 있어/내 발길을 오래 머물게 하네/…/길을 그리기 위해서는/…/그 쓸쓸한 소실점을 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여는 시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에서)
세계 각지의 풍경으로 걸어 들어가는 저자의 행위는 자신의 내면을 산책하는 일과 같다. 사람들의 평범한 뒷모습도 시인의 눈을 거치면 새삼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타인의 시선에 무방비로 노출된 등을 가졌다는 것. 자신이 알지 못하고 어찌할 수도 없는 신체의 영역이 있다는 것이 왠지 두렵고도 안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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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시인이 찍은 사진도 함께 담겼다. 글의 내용과 직접 관련된 사진이어서 저자가 어떤 풍경을 보고 글과 같은 생각을 떠올린 것인지 바로 다가온다. 마치 함께 산책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꼭 여행지에 관한 정보가 없어도, 심오한 철학이 담긴 게 아니라도 좋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과장 없고 따스한 시선이 담긴 문장이 독자의 가슴도 따듯하게 만든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