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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해의 인사이트]문재인의 매머드 폴리페서

입력 | 2017-04-06 03:00:00


최영해 논설위원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후보 정책자문단장을 맡았던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2003년 2월 24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문 닫은 뒤 바로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았다. 조각(組閣) 명단에서도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초대 청와대 정책실장에 이정우 경북대 교수가 내정되자 “김병준이 팽(烹)당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돌았다. 당장 노 후보 정책자문단 교수들이 “이제 우리는 누가 챙기느냐”며 술렁거렸다.

김병준 밀렸나? 교수들 술렁

김병준은 “밀린 게 아니다. 내가 자리 잡으면 여러분 자리를 챙겨볼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며 교수들을 위로했다. 점심, 저녁 자리에서 교수들을 달래느라 두 달 가까이 보냈다. 캠프에서 일한 교수들은 명단이 공개되지 않아도 학교에선 이래저래 소문이 나게 돼 있다. 열심히 뛰었다는 얘기는 많았는데 집권 후 공직 한 자리 얻지 못하면 교수 사회의 ‘뒷담화’를 견디기가 쉽지 않다.

노 대통령 귀에도 곤경에 빠진 김병준의 얘기가 들어갔다. 노 대통령은 2003년 3월 과천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열린 신임 장관 연찬회에 김병준 부부를 초청했다. ‘민간인’ 김병준은 국민대 교수 명함을 들고 갔다. 눈치 빠른 관료들에게 김병준이 ‘죽지 않은 카드’라는 것을 알린 시그널이었다. 두 달 뒤 김병준은 대통령 직속기구로 행정개혁을 총괄하는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장을 맡는다.


노 후보 정책자문단에 소속된 교수는 40명 남짓 했다. 명단이 외부에 알려진 사람은 10명 안팎이었다. 노무현 지지 선언 교수들이 1000명을 넘었지만 캠프에는 이름을 넣지 않았다. 김병준은 “대통령에 떨어지면 교수들에게 미안하고, 당선되더라도 자리를 마련해줘야 한다는 부담이 컸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도 집권 초부터 3년 차에 이르기까지 교수들에게 자리 나눠 주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정책을 틀어쥐고 운용해 본 경험이 별로 없다. 문 후보의 싱크탱크 ‘정책공간 국민성장’에 참여하는 교수가 1000명을 넘었다. 대선캠프 ‘더문캠’과 각종 위원회에 이름을 올린 교수도 400명이 더 있다. 노무현 정책자문단의 30배를 웃돈다. 캠프에서 세 과시를 하느라 교수들을 끌어모았고, ‘대세론’을 탐닉한 폴리페서들이 줄 대기한 것과 맞물려 매머드급 자문단이 탄생하게 됐다. 한 지방대 교수는 “캠프에서 먼저 연락이 와 자문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겠느냐고 해 학회 소속 회원 20∼30명 명단을 건네줬다”고 귀띔했다. 아직까지 회의에 한 번 참석한 적도, 후보 얼굴을 본 적도 없다.

더문캠, ‘그들만의 리그’ 만드나

문 후보는 “선거대책위원회 발족 후 사람들 영입은 더 광폭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지금도 차고 넘치는데 정권을 잡으면 저 많은 교수들을 어떻게 감당할지 궁금하다. 이런저런 위원회가 우후죽순으로 생기면서 아마추어 교수들로 채워지지는 않을지 관료사회에선 벌써부터 한숨 소리가 들린다. 임기 중 해마다 200명씩 배치해도 자리가 모자랄 판이다. 문재인 폴리페서, ‘그들만의 리그’가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정책적 비전과 상상력, 집행력, 행정 경험이 없는 교수는 학교에서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도 현장에선 빛을 발하기 쉽지 않다. 소수정예로 자문단을 꾸린 노무현의 고민을 문재인이 조금이라도 나눴더라면 이렇게 판을 크게 벌일까 싶다.

최영해 논설위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