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주변 후회 기류 감지돼… 그래도 回軍은 한번 더 죽는 길 킹메이커가 ‘킹’ 되려는 김종인… 虛舟 ‘빈배 정신’ 배웠으면 승복 정신 잃은 박근혜의 비극… 존엄 잃은 보수엔 기회 안 와
박제균 논설실장
여기엔 여러 함의(含意)가 있다. 한국 유권자의 투표 성향이 대체로 관성(慣性)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변화를 바라면서도 한번 지지했던 후보는 잘 바꾸려 하지 않는다. 또 ‘대권 재수’에 관대하다는 의미다. 재수 후보 또한 대선에서 석패(惜敗)하면서 금쪽같은 ‘대권 노하우’에 접할 기회를 가졌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요즘 누구보다 땅을 치고 후회할 사람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일지 모른다. 반 전 총장이 중도하차하지 않고 지금까지 대선 주자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면 어땠을까. 문 전 대표와 자웅을 겨루는 유력 주자가 됐을 것이라고 나는 본다.
아무리 그래도 아닌 건 아니다. 반 전 총장이 다시 대선판에 돌아오려 한다면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선 출마만큼이나 명분 없는 일이다. 황 권한대행은 사석에서 ‘대통령 코스프레’를 한다는 오해를 받기가 싫어서 방탄차를 타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군 통수권자가 그러면 되느냐’는 질문에 “총 맞지 뭐…”라고 농을 했다가 “우리나라는 그렇게 총 쏘기 쉬운 나라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불출마 선언으로 대통령 코스프레 논란이 사라진 지금은 방탄차를 타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보수 유권자들은 반기문의 경륜과 황교안의 대쪽 성품이 아쉽다. 그래도 번복은 안 된다. 정치를 희화화(戱畵化)할뿐더러 보수가 한 번 더 죽는 길이다.
공동화(空洞化)된 보수 표심을 노려 곁불을 쬐려는 사람들도 있다. 좌우 진영을 3번이나 넘나들었던 김종인 전 민주당 대표(77)가 이번에는 ‘킹메이커’와 ‘킹’ 사이를 넘나들고 있다. 보수층의 ‘문재인포비아’에 기대어 보수·중도를 엮어내면 킹도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듯하다.
김종인의 정치판을 읽는 탁월한 능력과 국정 경험을 존중한다. 그러나 킹메이커와 킹은 다르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참여 전력(前歷)에 뇌물죄 유죄 판결까지 받은 분이 나설 때와 안 나설 때를 가렸으면 한다. 탁월한 킹메이커였으되, 대권에는 철저하게 선을 그었던 허주(虛舟·김윤환 전 신한국당 대표)의 ‘빈 배 정신’을 배웠으면 한다.
김종인과 ‘제3지대’ 후보 단일화를 추진한다는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장(71)은 또 어떤가. 2007년 대선부터 출마를 저울질하더니 이번에도 다시 나타나 별 관심도 끌지 못하는 단일화를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 가벼운 언행은 접어두더라도 대법원 판결을 남겨둔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원내 2당(93석)인 자유한국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많은 보수 유권자들이 허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승복이야말로 그 뒤 연달아 두 개의 보수정권을 여는 정치적 맹아(萌芽)가 됐다. 오늘날 박 전 대통령의 비극은 객관적 사실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바로 그 승복의 정신을 잃어버린 데서 비롯됐다. 보수도 설령 대선에서 패할지언정 마지막 존엄마저 잃어버린다면 다신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박제균 논설실장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