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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석의 시간여행]발해, 요령과 항공모함

입력 | 2017-01-16 03:00:00


 항공모함을 앞세운 중국 전단(戰團)이 미국 일본 한국의 요충 주위를 휘저으며 한 달간 원정을 벌였다. 이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에서 중국이 내보인 전투 장비에는 한국에 특히나 익숙한 이름들이 붙어 있다.

 주역인 항공모함의 이름은 ‘요령(遼寧)’이다. 랴오닝으로 표기되지만 이는 근래의 일이고, 장구한 세월 한국인에게 ‘요령’으로 발음되고 표기되어 온 유서 깊은 명칭이다. 만주의 중심인 요령성(遼寧省), 거기서 뻗어 나온 요동(遼東·랴오둥)반도가 금세 연상된다. 그리고 고려 말 요동정벌과 이성계의 항명, 요동반도 남단에서 조선과 함께 운명한 안중근….

 요령호가 이끄는 항모 전단은 먼저 발해(渤海·보하이)만에서 대대적인 실탄 훈련을 벌였다. 보하이 만이라고 표기할 때보다 종래대로 ‘발해만’이라 하면 그 정체가 한결 뚜렷하다.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는 요(遼)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 요령성을 관통하는 요하(遼河·랴오허 강)가 바다에 이르면 발해가 되고 발해는 황해, 즉 서해로 확장된다.

 항모 요령호에서 솟구쳐 오르는 전투기의 기지는 선양, 즉 심양(瀋陽)에 있다. 요령성의 성도(省都) 심양. 병자호란 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선인 남녀가 노획물처럼 북으로 끌려가 장기 억류되었던 그 심양이다. 요나라를 멸한 금(金)나라의 후신인 후금(後金)이 청나라로 변천하는 과정에 벌어진 정묘와 병자년의 조선 침략.

 “적은 요령과 심양에 오래 있던 군사들이니 필시 수전(水戰)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을 어찌 감당하겠는가.”(인조실록 1627년 1월 27일자)

 정묘년에 호란을 맞아 피란길에 오른 조선의 국왕이 측근에게 하는 말이다. 강화도로 건너가면 무사하겠느냐는 걱정이다. 측근은 왕을 안심시킨다.

 “임진년에 섬나라의 배들도 발을 붙이지 못했는데 어찌 대륙의 오랑캐들이 가능하겠습니까.”

 요령의 벌판을 달려 압록강을 넘은 적은 순식간에 평양을 점령했고, 선봉은 개성을 향해 남하하는 중이었다. 324년 후 6·25전쟁의 1·4후퇴에서 재연된 기세와 유사했다. 

 “개성 이북 백성들이 살육을 당할 터인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 지역민들을 강화도로 함께 옮기자는 안이 나온다. 왕은 반대다.

 “강화도로 데려왔다가는 굶어죽게 될 것이다.”

 당장 먹을 쌀을 서울의 창고에서 운반해 오는 일이 급선무였다. 임금 떠난 서울의 도성은 삽시간에 텅 비어 빈집털이 도적들만 난무했다. 노량진으로 건널 나룻배가 부족해 강변 백사장에 주저앉은 왕은 그런 보고를 받았다. 임금과 왕족의 피란 행차를 빌미로 민폐를 끼치는 관리들, 임금 수행 업무를 팽개치고 도주하는 관리들 단속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 이 와중에 서로 시비 걸고 모함하는 공직자 간 암투가 병행되었다. 안팎으로 난리였다. 평양성에서 퇴각한 평안도 관찰사를 처단하라는 상소가 피란길 국왕의 귓전을 울려 댔다. 강화도 피란지에서 결국 효수형을 집행했다. 난중의 난이랄까, 전시에 적군의 장수가 아닌 아군의 장수를 베는 일로 바쁜 것은 임진년 때와 흡사했다.

 그 정묘년의 겨울로부터 390년이 흐른 지금, 항모 ‘요령’은 특별 임무를 마치고 칭다오, 그러니까 청도(靑島)의 모항에 귀환했다. 한국인들도 즐겨 찾는 칭다오맥주의 원산지다. 이처럼 친숙한 고유명사들과 달리 타격의 주력인 전투기의 이름은 젠, 즉 섬(殲)인데, 다 죽여 없앤다는 사전적 의미다. 보기 드물게 노골적으로 으스스한 작명처럼 보인다. 원정 종료에 맞춰 지난 주말 중국 북부에서 남하한 냉혹한 대륙고기압처럼.
 
박윤석 역사칼럼니스트·‘경성 모던타임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