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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 이명학 원장

입력 | 2016-10-06 15:59:00



인문학적 소양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전을 읽는 것이다.
우리를 오래된 지혜의 보고로 안내하는 한국고전번역원 이명학 원장과의 만남.

고전(古典)은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오랜 시간을 거치며 많은 사람들에게 가치를 인정받아 전범(典範)을 이룬 작품을 의미한다. 인류가 책갈피마다 켜켜이 쌓아올린 이 지혜의 보고는 존재와 세계의 통찰을 통해 우리가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요즘 각광받는 인문학의 정점에 고전이 있으며, 현대사회에서 가장 요구되는 능력 중 하나인 창의성이나 상상력도 고전이라는 튼튼한 토양 위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서양의 고전에 비해 우리의 고전은 지금껏 주목받지 못했다. 대부분 한자로 돼 있어 어렵고 멀게 느껴진 탓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은 한자로 기록된 원석 상태의 기록을 번역, 우리가 곁에 두고 지혜를 구할 수 있는 보석으로 만들어주는 곳으로, 특히 2014년 이명학 원장 취임 이래 대중과 가까워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웹툰과 애니메이션을 통해 어린이들이 쉽고 재미있게 고전을 접할 수 있도록 하는 앱 ‘고구마(고전에서 구하는 마법 같은 지혜)’, 매일 아침 좋은 고전 글귀를 메일링으로 서비스해주는 ‘고전산책’, 어린이와 청소년, 성인 등 다양한 연령의 눈높이에 맞춘 교양 고전 번역서 발행 등이 그 결과물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사이트에 〈조선왕조실록〉 등의 한글 번역본이 원문과 함께 올라와 있더군요. 도서관 깊숙이 보관돼 있을 줄만 알았던 기록물들을 이렇게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고전 DB 작업은 오래전부터 해온 일인데, 한 해 국내에서 1백20여만 건, 해외에서 8만여 건의 조회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 미국 애리조나주립대학에서 한국학을 연구하는 한 교수로부터 메일을 받았는데, 외국에서 한국학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한국고전번역원의 DB가 없으면 연구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하더군요. 고전 작품마다 주제별로 분류가 잘돼 있어서 누구나 DB에 들어가 날씨, 지진, 질병, 음식 등 찾고자 하는 키워드를 입력만 하면 재미있고 다양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 중 상당수도 한국고전번역원의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웹툰 작가 순의 〈탐묘인간〉 시리즈 중 하나인 ‘임금님의 고양이’ 편은 저희가 번역해 DB로 만들어놓은 조선시대 야화 모음집 〈대동야승〉에 등장하는 숙종과 그의 고양이 금손이 이야기에서 소재를 가져다 만들었다고 합니다.


▼ 4년마다 개최되는 세계기록총회가 지난 9월 서울에서 열렸습니다. 우리나라가 그만큼 기록 강국이라는 방증이겠죠.

유네스코는 세계적으로 가치 있는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직지심체요절〉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난중일기〉 〈동의보감〉 등을 비롯 총 13건이 등재돼 있습니다. 양으로 보자면 독일, 영국, 폴란드에 이은 세계 4위, 아시아 1위 수준이고 질적인 면에서도 다른 나라들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우수합니다. 왕과 신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기록한 〈승정원일기〉를 보면 우리 선조들의 기록 정신이 얼마나 치열하고 엄격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 이들 기록물들을 번역하는 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이 됐나요.

〈조선왕조실록〉은 1993년 완역이 됐습니다만, 그 이후에 축적된 학술적 성과를 반영하고 어투를 현대적으로 다듬는 재번역 작업을 현재 진행 중입니다. 〈승정원일기〉는 2억4천여만 자에 이르는, 단일 서적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글자 수입니다. 중국의 전 역사를 기록한 〈이십오사(二十五史)〉도 4천여만 자에 불과하거든요. 그런 만큼 번역 작업에도 공이 많이 들어가는데, 현재 속도라면 앞으로 50년 정도 더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환갑이 되어야 다 볼 수 있다는 얘기죠.


▼ 훌륭한 기록 유산을 갖고 있음에도 이를 번역하고 현대화하는 작업에는 소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수한 기록물들이 있음에도 읽지 못하고 있으니 일면 부끄러운 일이죠. 문화 강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고전에 대한 더 많은 연구와 관심이 필요합니다. 〈대장금〉이나 〈별에서 온 그대〉 등 전 세계에 한류 붐을 일으킨 드라마들도 한문 역사서 안의 단편적인 기록에 작가적 상상력이 결합돼 탄생한 것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작품들이 번역되면 그 안에 담긴 어마어마한 콘텐츠가 고스란히 우리의 문화 자산이 되는 것입니다.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출신인 이명학 원장은 성균관대 학생처장·입학처장·사범대학장·교육대학원장·한국한문교육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는 동안 고전과 대중의 거리 좁히기에 주력해왔다. 이는 비단 한자를 해독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녹아 있는 인문 정신을 계승하는 것까지를 아우른다. 자비 2억원을 들여, 소년 어사가 왕의 명으로 전국을 기행하며 예와 의를 지키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지키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벌을 주는 이야기를 담은 효(孝) 애니메이션 〈Yeah, 예~ 소년어사 출두요〉를 제작, 전국 초등학교 6천2백여 곳과 소년원, 교도소, 해외 한국문화원 등에 무료 배포한 것은 널리 알려진 에피소드. 성균관대 사범대학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중국 몽골 등에서 한글 백일장을 열어 입상자들에게는 한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는데, 이것이 베트남과 유럽으로까지 확대돼 세계 곳곳에 친한파를 키워내는 산실이 되고 있다.


▼ 사재를 털어 효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선친(이상목 전 동아계측기기 대표)의 고향이 평양인데 18세 때 공부를 하려고 혈혈단신 서울에 오셨다가 6·25 전쟁으로 북에 계신 부모님과 생이별을 했고, 부모님에 대한 송구함 때문에 늘 효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하셨습니다. 효 공원도 만들려다가 그곳을 채울 콘텐츠가 마땅치 않아 포기했었죠. 선친이 5년 전 암으로 투병 중일 때 그때 일이 생각나서 효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고 하니 좋아하셔서, 유지를 받들어 이를 완성하게 됐습니다. 그걸 보고 단 한 명이라도 효에 대해 생각하고, 실천하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 부친께서 훌륭한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선친께서 당신보다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반말을 하는 걸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또 본인이 힘들게 공부했기 때문에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셨죠. 어릴 적 저희 형제 운동화는 안 사주면서 신문 배달하는 아이의 운동화를 사주셔서 동생이 서운해 한 일도 있습니다. 저희도 모르게 도움을 준 사람도 있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감사 편지도 받았고요. 지금 돌이켜보면 선친의 삶 자체가 저희 형제에겐 훌륭한 교과서였던 것 같습니다.


▼ 고전 중 특히 좋아하는 책이나 글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인간의 삶이 어떻게 구현되고 거대한 역사 흐름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며, 아울러 주체적인 생각을 지니고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중요한지 느꼈고요. 다양한 인간 군상의 삶을 통해 살아가는 지혜를 배운 것이지요.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비굴하게 사는 사람들의 최후도 보게 되고요. 이게 살아가는 공부지요.

좋아하는 글귀는 논어에 있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는 구절입니다. 풀이하자면 ‘내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마라’는 것입니다. 살면서 이 구절만 염두에 두고 실천한다면 자신도 행복하고 우리 사회도 맑아지리라 생각합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갑질 문화를 바로잡을 수 있는 교훈도 될 겁니다.


▼ 자녀와의 관계로 힘들어하는 주부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글귀가 있다면요.

조선 후기 기생 능운의 시 중에 ‘대랑군(待郞君)’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우리 낭군 달이 뜨면 오겠다 하시더니 달이 떠도 우리 낭군 오시지 않네. 생각건대 응당 우리 낭군 계신 곳엔 산이 높아 달이 더디 떠서겠지’라는 내용입니다. 아이 일로 마음 졸이고 억지로 시킨다고 달라지는 게 있습니까. 본인만 힘들어질 뿐이죠. 부모님들께서 조급해 마시고 좀 넓고 길게 자녀들이 어떤 삶을 사는 것이 행복한지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고전에는 선현들의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인생을 관조하면서 어떤 삶이 행복한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운 삶인지, 책을 읽고 자녀에게 조용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시고 의견도 나누는 대화의 시간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어려서 읽은 고전을 통해 체득한 인문학적 가치는 나이가 들어도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따뜻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진 홍태식 디자인 김영화
editor 김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