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박수근미술상 수상 황재형 작가 태백 작업실을 찾아
제1회 박수근미술상 수상자로 선정된 황재형 작가는 “화려함과 웅장함을 바라지 않으면서 소박하고 평범한 가치를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고 말했다. 요즘 그는 몇 년 전 그린 백두대간 풍경에서 ‘산의 기운을 가린 형태’를 걷어내는 수정 작업을 하고 있다. 태백=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태백에 산 지 이제 33년째다. 나를 두고 ‘탄광촌에서 광부 그리는 화가’라고 하지만 나는 인간 삶의 풍경이 풍성하게 드러난 공간을 찾아 헤매다 인연을 얻어 이곳으로 왔을 뿐이다.”
박수근미술상 심사위원단은 황 작가를 수상자로 선정하며 ‘관찰자의 그림이 아닌, 삶과 일치하는 예술 작업을 견지해 온 흔치 않은 작가’라 평했다. 그의 작업실 가구는 20년 전 서해 바닷가를 떠돌다 마주한 폐선에서 주워온 목재를 깎아 만든 것이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이야기한 양졸(養拙·질박함을 기르다)의 가치를 좇아 왔다. 박수근 선생과 내 작품의 가치관이 닿는 지점이라 본다”는 그의 말이 사실임을, 작업 공간 곳곳의 흔적이 증명한다.
“대학 시절 강원도 탄광촌을 돌아다니다가 김 씨를 갱에서 만났다. 나는 책에 나오지 않는 노동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려 한 풋내기였다. 어느 날 김 씨가 집으로 식사 초대를 했다. 마누라가 곗돈 들고 도망가 혼자 살던 이라 직접 밥상을 차려 왔는데, 라면과 김치 찌꺼기가 상 곳곳에 붙어 썩어 있었다. 구역질 참으며 대충 앉았다 돌아오는 길에 회의감이 밀려왔다. 글로 읽어 얻은 관념과 실체의 괴리가 몹시 부끄러웠다.”
황재형 작가의 출세작인 유채화 ‘황지330’(1981년). 강원 태백시의 한 탄광에서 사고로 숨진 광부가 남긴 작업복을 그렸다. 황재형 작가 제공
“아들이 두 살 때였다. 그림으로 생계를 꾸릴 처지일 리 없었다. 광부 훈련을 받으러 갔다가 ‘대학 나온 이가 갱에 들어오려 하는 게 의심스럽다’고 면박당한 채 쫓겨났다. 그래서 큰 국영 광업소는 못 들어가고 민영 광산만 떠돌며 현장에서 일을 배웠다. ‘손가락 흰 녀석이 사장 첩자 짓 하러 들어왔다’고 오해받아 몰매 맞을 위기도 겪었다. ‘재봉사였는데 공장장 마누라와 눈 맞아 여기로 도망 온 것’이라고 둘러대 겨우 모면했다. 하하.”
전남 보성 출신인 황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종일 그림만 그렸다. 그림을 업(業)으로 삼은 뒤에도 꼬마 때처럼 외곬으로 미술계와 소통 없이 묵묵히 붓만 움직이며 살아왔다.
태백=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