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이라도 들어왔으면
이 몸에
목소리라도 들어왔으면
이 몸에
아무것도 듣도 보도 못하는
이 막막함!
이 막막함을 붙들고
나는 살아가야 하리
천지사방 분간이 안 되는
이 막막함으로
칠흑의 밤을 더듬거리며
더듬거리며 걷다니
이 막막함을 쫓아가다
넘어져도, 눈멀어도
붙들어줄 그대 목소리
그대의 혼이라도 내게
들어와줬으면.
꽃샘바람 헤치고 저 섬진강에서 매운 향기 올라오고 있다. 여기 한 뼘 키에 고깔모자 쓴 ‘청화백자매조죽문호(靑華白磁梅鳥竹文壺·국보 170호)’에 도화서 화원이 그린 매화나무 가지에 한 쌍 새 날아들어 마주보며 지저귀는 사랑소리 더불어 ‘봄 온다, 봄 온다!’고 꽃향기 천 리 길 달려오고 있다.
이 작은 항아리에는 매화, 대나무, 국화, 새가 돌아가며 조화롭게 청화로 그려져 있고 연꽃봉오리 모양 꼭지를 한 뚜껑에도 매화와 대나무가 휘감아 돈다. 옛 선비들은 권력과 이익에 눈을 돌리지 않고 불의에 허리 굽히지 않는 절의의 정신을 눈바람에도 푸르름과 향기를 잃지 않는 매란국죽에 빗대서 시로 기리고 그림으로 찬미하였으니 신흠은 “매화는 일생토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고 그 높은 절개를 읊었고 고려 말 충신 원천석은 “아마도 세한고절(歲寒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고 시조로 자신의 충절을 노래했다.
바로 물감을 찍어 한 붓에 그리는 몰골화법(沒骨畵法)으로 신들린 듯 완성한 구도와 탑 모양의 작은 항아리는 조선백자가 뽑아낸 최고의 걸작이다.
시인은 이 신품 앞에서 그만 막막한 영혼의 소리를 듣는다. ‘넘어져도, 눈멀어도/붙들어줄 그대 목소리/그대의 혼이라도 내게/들어와줬으면’ 하고. 그렇구나, 조선백자여. 너는 따라잡을 길 없는 하늘 밖의 소리이구나.
이근배 시인·신성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