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사무총장 중 두 번째,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이후론 첫번째 방북한 유엔 수장 1993년 12월 북핵 위기 때 ‘평화 중재자’ 역할 기대 안고 평양 갔으나 ‘유엔연합사 해체, 평화협정 대체’라는 엉뚱한 요구만 듣고 빈손 귀국
부트로스갈리 총장은 북핵 위기가 고조되던 1993년 12월 24~26일 평양을 방문했다.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올라갔다. 당시 국제사회는 유엔 사무총장이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중재자 또는 해결사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크게 주목했다. 그러나 북한은 그런 기대를 저버렸다. 당시 김영남 외교부장(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24일 부트로스갈리 총장을 위한 연회에서 “유엔의 역할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한 실천적 조치를 취하는 것, 즉 유엔연합사를 해체해서 유엔과 북한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바로잡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당시 김일성 주석도 부트로스갈리 총장과 만남에서 “북한은 미국과 핵문제에 관해 협의를 계속하고 있다. 유엔이 이 문제에 직접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부트로스갈리 총장은 “유엔연합사 해체 문제,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뀌는 문제가 논의되려면 먼저 한반도 평화가 이룩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당시 서방 언론 등의 평가는 “북핵 문제 해결의 중재자 역할을 하러 갔다가 ‘유엔사부터 해체하라’는 엉뚱한 주문을 받고 왔다”는 비판론이 많았다. 한마디로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이고 왔다’는 얘기다.
부트로스갈리 총장에 앞서 1979년 5월 평양을 방문했던 발트하임 총장은 당시 김일성 주석에게 “한반도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반도 문제 해결 과정에서 당사자인 한국을 제외하는 건 불가하다”며 ‘사무총장이 지명한 인사가 남북한 쌍방의 대화 통로로서 옵서버 역할을 하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서는 “김일성이 ‘북한은 남침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고 전하기도 했다.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