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원 다수당대표 총리 임명’… 법에 없어도 오랜 ‘헌법적 관습’ 민주주의를 지키는 건 法 아닌 사회지도층의 의지 선거구 없는 초유의 사태… 국회는 법이라도 지키시라
이미현 객원논설위원 연세대 법학과 교수
그러나 자연법칙과는 달리 사회규범은 그 존재만으로 사회질서 유지라는 결과가 당연히 수반되지는 않는다. 건강한 사회는 사회규범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일 뿐이다. 사회규범 중 특히 사회의 기본적 질서 유지에 필수적이라 강제력이 부여된 것을 우리는 법이라 부른다.
최소한의 생존권만이 확보된 상태를 행복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 것처럼 법만이 지켜지는 사회는 결코 바람직한 사회라고 할 수 없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일 뿐이다. 건강한 사회가 되려면 사회 구성원의 행동기준은 준법을 넘어 전반적인 사회규범의 준수가 되어야 한다. 특히 국가를 이끌어가는 정치 영역에서는 위법 여부가 아니라 사회상규 부합 여부가 논의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법원으로 가져가면 법원으로서는 법을 우선적으로 적용하여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법부의 역할인 동시에 사법부의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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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렇듯 막강한 권한을 갖는 의회를 비롯하여 영국 정치를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 헌법적 관습(constitutional conventions)이다. 헌법적 관습이란 국왕과 행정부 또는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관계 등에 대해 오랜 역사를 거쳐 형성된 관행이나, 명시적 또는 묵시적 합의 등에 근거한 행동규범에 불과하므로 법적 구속력이 없다. 즉 위반하더라도 아무런 법적 제재 수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적 관습은 오랜 세월 동안 상당히 충실하게 지켜져 왔다. 예를 들면 영국 민주주의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는, 국왕이 하원의 다수당 지도자를 총리로 임명하는 전통은 헌법적 관습으로만 머물다가 20세기에야 비로소 성문법규에 반영되었다. 그래도 입헌군주제가 확립된 17세기 이래 국왕이 다수당 지도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총리로 임명한 적은 없다.
법적 구속력이 없는 헌법적 관습이 이토록 충실하게 지켜져 온 이유는 오로지 그렇게 하는 것이 정치적 편의성과 전통 존중의식의 요구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어지간한 정치적 문제는 정치권 내에서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야말로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내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사실 외형만 보면 영국의 최고법원은 최근까지도 의회의 일부에 불과했다. 2009년 10월 대법원(The Supreme Court of the United Kingdom)이 독립기관으로 공식 출범하기 전까지는 최고법원의 역할은 상원의 항소위원회(The Appellate Committee of the House of Lords)가 담당했다. 항소위원회 소속 상원의원들도 법적으로는 입법권이 있는 상원의원 신분이지만 실제로 이들은 입법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오로지 재판만을 담당했다. 상원 역시 항소위원회의 업무에 전혀 관여하지 않음으로써 사법부의 독립이 사실상 유지됐다. 그렇다고 2009년 이전의 영국이 사법부 독립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국가라고 여기는 사람도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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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현 객원논설위원 연세대 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