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
숙맥(菽麥). 글자 그대로는 콩과 보리다. 중국 문헌 ‘좌전(左傳)’의 ‘숙맥불변(菽麥不辨)’에서 나왔다. 콩인지 보리인지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 요즘은 의미가 확장돼 ‘모자라고 어리석은 사람’이나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을 가리킬 때 쓴다.
그런데 숙맥을 ‘쑥맥’으로 알고 있는 이가 의외로 많다. 숙맥이 한자어라는 사실을 모르고 습관적으로 된소리를 쓰면서 굳어져 버린 탓이다. 경북에서는 숙매기, 황해도에서는 숭맥이라고 한다.
‘복불복(福不福)’은 ‘1박2일’이라는 여행 프로그램의 덕을 톡톡히 본 낱말이다. 언중은 이 낱말을 입길에 올리면서도 정확한 뜻을 모른 채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복굴복’ ‘복골복’ ‘복걸복’ 심지어 ‘복질복’이라고도 했다. 물론 이 단어들은 사전 어디에도 없다.
복불복은 복이 있음(유복)과 복이 없음(무복), 즉 사람의 운수를 이르는 말이다. ‘복불복 야외취침’ 등을 본 사람이라면 복불복의 의미를 쉬이 알 것이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팀은 어김없이 엄동설한에 벌벌 떨면서 노숙을 해야 하니. 그래서 복불복은 제비뽑기 등을 할 때 자주 쓰인다.
삼수갑산(三水甲山)도 숙맥과 닮은꼴이다. 사람들은 물(水)과 산(山)에 끌려 경치가 수려한 곳쯤으로 지레짐작해 산수갑산으로 발음하기도 한다. 허나 정반대다. 삼수와 갑산은 조선시대에 험하고 추운 귀양지의 대명사였다. ‘삼수’는 함경남도 북서쪽 압록강 지류에 접해 있고, ‘갑산’은 양강도 개마고원의 중심부에 있다. 두 곳이 얼마나 험한 곳이었으면 “삼수갑산에 가는 한이 있어도…”란 말까지 나왔을까. 삼수갑산도 요즘은 ‘어려운 지경이나 상황’을 뜻하는 말로 자리 잡았다. 말은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수용함으로써 그 생명을 연장한다.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