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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하태원]유승민 퇴진의 명분

입력 | 2015-06-30 03:00:00


하태원 정치부 차장

6개월 전 취재수첩을 뒤적거리다 보니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와 나눴던 대화 내용이 눈에 띄었다. 원내대표 공식 출사표를 내기 직전 국회 의원회관에서였다. 오늘 발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현재 그의 정치적 상황과 빼닮았다.

“박근혜 대통령 잘하시라고 한 이야기다. 정치적, 인간적 신의는 절대 버리지 않겠다는 마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친박(친박근혜)계 핵심 인사들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더라. 나를 매사에 삐딱하게 본다.”

당시 발언 맥락은 경선 후보로서 친박 진영을 향해 이해를 구하는 차원이었던 것 같다. 2012년 대선 직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자 “(박 대통령이) 다양한 이야기를 듣지 않아 판단에 문제가 생긴다. 대화할 때 한계를 느낀다”고 한 것이 좀 켕겼을 수도 있다. 이후 ‘청와대 얼라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 등 청와대로서는 피가 거꾸로 솟을 만한 독설 리스트를 양산해 내면서 돌이킬 수 없는 다리를 건넌다.

제대로 염장 지르는 말인지도 모르고 “옛날에 그렇게 친했는데 박 대통령께 전화를 하든지 한번 찾아뵙고 오해를 풀면 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다.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를 한다는 듯 ‘허허’ 쓴웃음을 지은 그는 “모시는 친구들(이재만 정호성 안봉근) 통해 뜻은 전한다”고만 했다.

그즈음 친박은 2014년 5월 서울시장 후보 경선, 국회의장 후보 경선, 그해 7월 당 대표 경선에서 충격의 3연패를 당했고, 올해 2월 2일 박 대통령 생일에는 원내대표 경선에서 유승민에게 19표 차로 졌다.

유승민이 현 정부의 성공을 기원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무대(김무성)와 청와대 친박 핵심 간에 갈등이 많다. 청와대와 무대의 중재 역할을 잘할 자신이 있다”고 했던 그의 발언은 비박계 지도부 득세 이후 심상치 않아 보이는 당청 관계의 조율사 역할을 자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90도로 허리를 숙여 “마음을 푸시고 마음을 열어 주길 기대한다”고 한 유승민의 사과를 ‘조롱’으로 느낄 만큼 박 대통령이 느끼는 배신의 감정은 뿌리가 깊어 보인다. 친박계 한 핵심 의원도 “당청 갈등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정무특보들과의 자리를 만들려고 했는데 유승민이 ‘그놈의 ××들 안 만난다’고 했다”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박 대통령의 ‘6·25 발언’으로 촉발된 여권발 내전(內戰)의 근본 원인은 박 대통령과 유승민의 지향점이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 현재 새누리당 노선으로는 2016년 총선은 물론이고 2017년 대선도 필패라는 인식하에 민생·경제정책 ‘좌클릭’을 시도한 사람이 유승민이다. 박 대통령이 몸서리치는 개헌과 관련해서도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과 묵계를 했다는 말도 들린다.

여의도연구소장 임명장을 받고 현실 정치인이 되는 장면은 아름답지 못했다. 15년 전인 2000년 정형근 의원 강제구인을 위해 사법 당국이 한나라당 당사를 포위했던 탓에 지하주차장 방화셔터를 50cm 연 틈으로 낮은 포복 하듯 당사에 들어가야 했다.

임기 반환점도 돌지 않은 살아 있는 권력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그가 모를 리 없다. 버티기 속에 살아남는다 한들 식물 신세라는 것도 잘 알 것이다. 유 원내대표 방에는 ‘정관자득(靜觀自得·고요한 마음으로 관찰하면 진리를 깨닫게 된다)’이란 글귀가 쓰인 액자가 걸려 있다. 박 대통령이 사퇴의 명분을 주지 않는다고 노여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아름다운 퇴장을 준비할 때라고 본다.

하태원 정치부 차장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