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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 속 죽음 묘사, 눈앞서 보는 듯 강렬하고 감각적

입력 | 2015-01-19 03:00:00

최문규 교수 연구서 ‘죽음의 얼굴’ 출간




김영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1996년)의 표지로 쓰인 자크루이 다비드의 유화 ‘마라의 죽음’. 최문규 교수는 이 소설에 대해 “작품 중 자살 퍼포먼스를 행하는 여류 예술가 미미의 죽음은 피의 전율이라는 맥락에서 흥미롭게 관찰될 수 있다”고 했다. 동아일보DB

“요강처럼 가운데가 뚫린 의자 위에 아내를 앉혔습니다. 의자 위에서 아내는 사지를 늘어뜨렸습니다. 아내의 두 다리는 해부학 교실에 걸린 뼈처럼, 그야말로 뼈뿐이었습니다. 늘어진 피부에 검버섯이 피어있었습니다. 죽음은 가까이 있었지만, 얼마나 가까워야 가까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김훈의 소설 ‘화장’)

“그녀가 오래 귀를 기울일수록 플라타너스 위로 내리는 가느다란 빗소리 같은 게 점점 더 분명하게 들려왔다. 일종의 해탈감이 그녀를 엄습해 왔다.―쉬어라, 쉬어라! … 원형 화단에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해시계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하얀 대리석 비석이 서 있었다.”(테오도어 폰타네의 소설 ‘에피 브리스트’)

김훈 작가는 ‘화장’에서 죽어가는 아내의 처절한 육신의 상태를 뼈만 남은 사지, 검버섯 등으로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반면 독일의 사실주의 작가 폰타네는 죽음을 앞둔 육체 상태에 대한 구체적이고 상세한 서술 대신 간결한 기호 십자가로 죽음만 확인할 뿐이다.

최문규 연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사진)가 ‘문학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죽어가는가’를 주제로 한국과 독일 현대소설 110편을 비교 분석한 연구서 ‘죽음의 얼굴’(21세기북스)을 출간했다. 그는 양국 소설을 비교하며 “한국 소설은 독일에 비해 죽음 자체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논의보다 병들어 죽어 가는 이 또는 죽은 이를 감각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소설 속 죽음을 10가지로 범주화했다. △육신의 부재(죽음을 추상적으로 묘사) △내던져진 사물(고독한 죽음) △피의 전율(피 흘리는 모습을 형상화) △병든 육신의 종착역(병으로 인한 죽음) △통보된 메시지(통보로 전달받는 죽음) △아름다운 이별(죽음의 아름다운 승화) △무감각한 마지막 대면(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무감각한 감정) △매체적 퍼포먼스(장례식) △자연으로의 회귀(자연과 죽음의 친화적 관계) △관계의 소멸(가까운 이의 죽음)이다.

이 중에서 한국 소설은 붉은색으로 강렬하게 죽음을 묘사하는 ‘피의 전율’이 두드러진다. 김동리의 ‘황토기’에선 “온 방이 벌건 피요 비린 냄새가 코에 훅 치받는다”, “거창한 신장을 피에서 그냥 건져낸 것처럼”같이 과장된 표현으로 죽음을 묘사한다. 콸콸 흐르는 붉은 피와 하얀 살갗, 침구, 눈(雪)을 대비하는 방식도 자주 쓰인다. 정이현은 ‘순수’에서 “벌거벗은 가슴 한복판에서 샘처럼 콸콸 솟구친 피는, 새하얀 목면 시트를 온통 붉게 적셨더군요”라고 썼다.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에선 “가슴께에서 쏟아진 피가 빠른 속도로 눈을 물들이고 있었다”고 묘사했다.

병원은 병을 치료하는 곳이 아니라 죽음을 통보하고 생산하는 삭막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박경리는 ‘불신시대’에서 “의사의 무관심이 아이를 거의 생죽음을 시킨 것이다. 의사는 중대한 뇌수술을 엑스레이도 찍어보지 않고, 심지어는 약 준비조차 없이 시작했던 것이다”고 썼다.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문학 속 죽음의 묘사를 다양화했다. 이홍의 ‘성탄 피크닉’에선 의인화된 아파트 폐쇄회로(CC)TV의 눈이 “결국엔 나를 판독해야 했다. 내게 저장된 진부한 기억의 그림들을”이라며 사건의 결정적인 증인으로 등장한다. 죽음의 통보도 인터넷이나 TV 뉴스로 전달된다.

최 교수는 “한국 젊은 현대 작가들이 독일에 비해 기발하고 발칙한 상상력으로 죽음을 그려내고 있다”며 “죽음의 새로운 가시화를 주장하는 서구의 문화 이론을 선취했다”고 밝혔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