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흥 논설위원
‘서울의 잘 알려진 가문에서 평양 출신을 사위로 맞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조롱과 비난, 심지어는 욕을 먹게 될 것이다.’
똑똑하고, 집안도 괜찮았지만 고향이 흠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1931년 4월 19일엔 ‘나는 지역파벌에 반대하면서 하루빨리 화해가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래서 서북인 중에서도 전형적인 서북인이라 할 수 있는 평양 청년을 사위로 맞아들였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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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이래 서울은 기득권의 상징인 수도였고, 평양은 정치적 홀대 속에 나름의 역사적 자부심을 지켜온 곳이었다. 두 곳을 중심으로 기호파와 서북파가 수백 년간 겨뤄왔다면 남북 대립의 연원은 6·25전쟁 이전으로 훨씬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래서 더 불안하다. 분단 70년 동안 더욱 이질화된 남과 북이 앞으로 통일 후 과연 순조롭게 화합할 수 있을지, 뿌리 깊은 반목과 질시의 지역감정이 도지지 않을지….
남북이 증오를 걷고 하나가 되기 위해선 통일에 앞서 접촉면을 넓히면서 통합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북은 신뢰가, 남은 전략적 포용이 필요하다. 웃으며 합의한 뒤 돌아서선 다시 도발하는 북의 행태는 배신감과 대화 무용론을 키운다.
반면 우리가 체제의 우위를 내세워 일방적으로 ‘통일 대박’을 강조하는 것도 북엔 흡수통일의 두려움을 느끼게 할 것이다. 남북에서 상대를 멸(滅)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득세하면 상생의 공감대를 넓힐 수 없다.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맨 왼쪽과 맨 오른쪽보다 중간에서 합리적인 목소리를 내야 그나마 부작용과 후유증이 적은 통일을 바라볼 수 있다. 상대를 점령하는 식의 급격한 통일은 이긴 측엔 통쾌해도 진 측을 자극해 결국 일등 국민과 이등 국민의 갈등, 분열을 배태할 가능성이 크다.
2005년 독일 총리가 된 앙겔라 메르켈은 동독 출신이다. 태어난 곳은 서독 함부르크지만 출생 몇 주 뒤 부모가 이주한 동독에서 자라고 학교를 다녔다. 그럼에도 통독(1990년 10월) 직후인 1991년 1월 헬무트 콜 내각의 여성청소년부 장관이 됐고 환경부 장관, 기민당 당수를 거쳐 총리에 올랐다. 통일 한국에서도 메르켈 같은 사람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서울의 저명인사가 평양 출신 사위를, 평양의 실력자가 서울 출신 며느리를 스스럼없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어야 참된 통일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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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