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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얼큰한 시월

입력 | 2014-10-24 03:00:00


얼큰한 시월
―전영관(1961∼)

작년에 나, 뺨 맞았잖아

장성댐이 깊기는 깊더구만 가을이 통째로 빠졌는데 흔적 없고
조각구름만 떠다니더군 백양사 뒷산 정도야 그 남색 스란치마에 감기면
깜박 넘어가지 않겠어 뛰어들까 싶기도 한데
집사람 얼굴이 덜컥 뒷덜미를 채더군

피라미 갈겨니 메기까지 푹푹 고아
수제비도 구름같이 떠오르는 어죽(魚粥) 한 사발 했지
반주로 농탁(農濁) 몇 대접 걸쳤다가 휘청
단풍에 취한 낭만파처럼 평상에 누웠던 거 아닌가
목침 베고 한 잠 늘어진 뒤 화장실에 가보니 아 글쎄
벌건 뺨에 손자국 선명한 거라 애기과부 손바닥 같은 단풍잎 대고 누워
잠시 딴살림 차렸던 거라 뭣에 쫓기기는 한 듯
뒷골 얼얼하니 내려오는 내내 흙길도 출렁거리더군

오늘 나, 거기로 뺨 맞으러 간다

혼자 쓸 한나절쯤 배낭에 챙겨 넣고 지팡이 들고
는실는실 웃는 고것들 후리러 간다 농탁(農濁)에 엎어진 핑계로
작년처럼 낮잠 한 숨 퍼지르고 올 참이야 한쪽 뺨 벌겋게 얻어터져야
후끈한 뒷맛으로 올 겨울 얼음고개 넘지 않겠나      
       

붉은 가을 산자락에 안긴 깊고 푸른 물에 조각구름이 떠다닌다. 물가에 섰노라니 ‘그 남색 스란치마’ 같은 물빛이 감실감실 마음에 감기는 게 뛰어들고 싶도록 유혹적이다. 어떤 풍경의 아름다움은 마치 팜파탈처럼 거역 못하고 빠져들게 관능적이다. 만나는 여자마다 팜파탈인 남자들이 있다. 자기를 파멸로 이끌 것을 알면서도 불빛에 꼬임 받는 나방처럼 그녀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는 그들은 그토록 절실한 것이다. 의무와 도덕의 철옹성인 일상을 살며 낙담과 권태와 무력감과 피로에 쌓인 사방 어둠 속, 거기 한 점 불빛인 치명적 쾌락! 위험을 감지하면서도 자기를 방기하는 일탈감! 그 자극!

화자는 가까스로 정신 차리고 발을 돌린다. 한산한 주막에 들어 폭 고은 어죽에 곁들여서 걸쭉한 농주를 몇 대접 마시고, 단풍나무 아래 평상에 누웠다가 ‘애기과부 손바닥 같은 단풍잎’이 뺨에 자국을 내도록 한잠 늘어진다. 그 자국이 아리따운 여인한테 맞은 매운 따귀 자국 같단다. 단풍잎 한 장에도 관능을 느끼는 시인! ‘뒷골 얼얼하니’ 흙길을 내려온 뒤, 쫓기듯 사느라 낭만이 멋쩍은 생활인인 화자에게 그 풍경 속 시간은 내내 낭만으로 남아 있다. 이 가을에 그는 숨겨둔 애인을 찾아가듯 다시 그곳에 갈 참이다. 그래야 ‘후끈한 뒷맛으로 올 겨울 얼음고개 넘지 않겠나’고!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