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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고기정]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관전평

입력 | 2014-07-21 03:00:00


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중국이 만들려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 자칫 두고두고 한국에 부담이 될 것 같다. 북한 때문이다. 당장은 우리가 AIIB에 가입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에 논의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입을 하든 말든 은행이 설립되고 나서 여기에 북한 변수가 끼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한국이 중국에 이어 2대 주주가 된다고 치자. AIIB가 북한에 인프라 투자를 한다면 우리는 반대해야 하나, 찬성해야 하나. 북한은 아시아에서 가장 인프라가 취약한 곳이다. AIIB가 투자할 명분은 충분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북한이 끊임없이 도발을 하는 상황에서 북한에 도로와 철도를 깔아주는 일에 우리가 돈을 대야 한다면 그 후과를 정부가 감당할 수 있을까. 드레스덴 선언을 내놓았으면서도 전 정권의 유산인 5·24조치를 풀지 못해 대북정책의 스텝이 꼬여버린 게 현 정부다.

반대로 미국의 압력 때문이든, 중국의 금융 패권에 동의하지 않아서든 우리가 AIIB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가정하자. 한국은 AIIB의 대북 투자에서 완전히 소외될 것이다. 북한 내 인프라 건설 현장에 한국 기업들이 삽 한 자루조차 꽂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지금처럼 인천 아시아경기에 선수단을 보내겠다며 한국을 떠보는 외교전을 펼치기보다 아예 대남 무시 전략으로 나갈 가능성이 있다. AIIB라는 돈줄을 발견한 까닭에 굳이 한국에 손을 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대북 이니셔티브 실종에 따른 책임론을 두고 공방이 벌어질 것이다. 더욱이 한국은 향후 북한 문제에서 중국만 바라보거나 미국에 더 의지하게 될 공산이 크다.

물론 ‘책임 있는 대국’으로서 북핵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중국이 은행 돈을 무조건 북한에 퍼주지는 않을 것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평양보다 서울을 먼저 찾을 정도로 한국의 전략적 가치도 높아졌고 최고지도자 간 친분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좋다. 하지만 중국이 세계전략이라는 큰 틀에서 북한이나 한국이 아닌 한반도 전체를 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중 밀월’이나 ‘북-중 냉기류’는 본질을 설명하는 정의(定意)가 될 수 없다.

중국 관영 매체들은 시 주석의 방한 기간에 한국이 미중 관계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완충지대론은 원래 중국이 북한에 쓰던 용어였다. 중국이 생각하는 한반도 외교의 일면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런 측면에서 중국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AIIB를 통해 북한을 지원할 것이다. 한국의 눈치를 보긴 하겠지만 한반도 외교에서 구현해야 할 목표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 한해서일 것이다. 시 주석은 이미 이달 초 한중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중국은 ‘객관적’ 입장을 견지한다. 각 측의 관심사를 ‘균형 있게’ 해결한다”고 선을 그었다.

중국 외교의 외연이 확장될수록 AIIB처럼 한국을 곤혹스럽게 하는 사건은 더 늘어날 것이다. AIIB 가입을 놓고 공방을 벌이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중국 내에서 ‘한중 관계는 동맹과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는 이미 중국이 그리고 있는 세계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한국이 미국과 안보와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이라는 점을 중국에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면서 중국과의 비즈니스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교과서 같은 얘기다. AIIB나 중국의 ‘대일(對日) 한중 공조’ 요구는 안보와 가치, 경제의 경계가 마구 뒤섞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중국의 굴기(굴起)에 기대어 곁불만 쬐고 불똥은 멀리하는 게 갈수록 쉽지 않아 보인다.

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