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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이재명]‘바보’ 김성식

입력 | 2014-03-10 03:00:00


이재명 정치부 차장

이렇게 안 풀리기도 쉽지 않다. 초지일관 자갈길만 골라 다닌 한 정치인 얘기다.

1977년 서울대에 입학했다. ‘출셋길’이 열린 그때 하필이면 대학 교정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전투경찰과 그늘 밑 벤치를 두고 시비가 붙었다. 흠씬 두들겨 맞은 그는 운동권 서클에 들어갔다. 이듬해 긴급조치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를 주도하다 처음으로 콩밥을 먹었다. 감방을 나와 이번엔 위장취업의 길을 택했다.

7년 만에 손에 쥔 대학 졸업장. 운동권 학생은 이제 재야 운동권이 됐다. 1986년 혁명을 꿈꾸다 두 번째 구속. 역사의 아이러니인지 그렇게 꿈꾸던 혁명(1987년 6월 항쟁)을 감옥에서 맞았다.

민주화가 움트자 제도권 정치에 몸을 담았다. 첫 시작은 민중당이었다. 이우재 이재오 김문수 등 내로라하는 운동권이 총출동했지만 1992년 총선에서 민중당은 단 한 석도 얻지 못한 채 공중분해 됐다. 재야세력이 앞다퉈 김영삼과 김대중을 따라 갈 때 그는 ‘꼬마 민주당’에 합류했다. 1997년 3김 청산의 깃발 아래 꼬마 민주당은 이회창의 신한국당과 합쳐 한나라당을 창당했다.

이제 인생이 좀 풀리나 했더니 그에게 날아온 지역구는 한나라당의 대표 자갈밭인 서울 관악갑이었다. 2000년에 이어 2004년 총선에서 연거푸 낙선하자 당시 한나라당 소속의 손학규 경기도지사가 그를 거뒀다. 경기도 정무부지사. 그에게는 번듯한 첫 감투였다. 이어 2008년 총선에서 눈물겨운 금배지를 달았다.

‘3선급 초선’이 국회에 들어오자 한나라당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민중당 출신이 한나라당 주류로 떠오를 때 그는 허구한 날 이명박 정부의 성장 위주 정책을 비판해댔다. 야당보다 독한 여당의원은 툭하면 “‘청와대 딸랑이’ 당 지도부는 물러나라”며 연판장을 돌려대더니 2010년 혈혈단신으로 당 대표 경선에 나와 11명 중 10등을 했다.

이제 쓴맛을 봤으니 찌그러져 있을 만도 한데 대선을 1년여 앞두고 한나라당의 재창당을 요구하며 탈당을 선언했다. 그의 악악거림에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옷을 갈아입고 총선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면 조용히 당으로 돌아갈 것이지 무소속으로 총선에 나서더니 낙선 기록 추가! 무슨 ‘바보 노무현’ 코스프레도 아니고….

한나라당을 탈당할 때 그가 남긴 말이다. “허허벌판에 서서 정치개혁을 위한 의병이 되고자 한다.” 드디어 의병장 안철수를 만나 정치개혁의 물꼬를 트나 싶더니 어라, 의병장이 달아나버렸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보스, 계파, 당론을 거부하며 주야장천 ‘새 정치’만 외쳐대더니 결국 둥지 잃은 새가 돼버렸다. 떠났으면 잘 살 것이지, 새누리당의 쇄신파 동지들은 안쓰러운 마음에 그에게 그만 돌아오라고 손짓했다. 그런 ‘무늬만’ 쇄신파들에게 그가 한방 먹였다. “난 홀로 근신할 테니 스스로 할 일은 스스로 하라!”

한국 정치가 왜 이 모양, 이 꼴이 됐는지 궁금한가. 김성식의 자갈길 정치 역정에 어렴풋이 답이 있다.

이재명 정치부 차장 egij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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