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심영섭이 짚어본 ‘변호인’ 신드롬의 사회심리학
영화 ‘변호인’은 5공화국의 대표적 용공 조작 사건인 ‘부림’ 사건을 소재로 한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델로 한 세무변호사 송우석(송강호·왼쪽)은 인심 좋고 강직한 국밥집 아주머니(김영애·오른쪽)의 아들 진우(임시완·가운데)가 시국 사건에 휘말리자 그를 변호하면서 불합리한 사회 현실에 눈뜨게 된다. 동아일보DB
‘변호인’을 보고 나면 누구나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리게 된다. 지지자든, 아니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바보 노무현이 보고 싶다는 관객들의 영화 평도 줄을 잇는다. 그러나 ‘변호인’은 현명하다. 주인공 이름은 송우석이지 노무현이 아니다. 그는 애초에 우리와 같았다. 고졸 출신으로, 온갖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 가다 어렵사리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세무 변호사로 돈도 수억 벌었다. 자신의 노동으로 층수를 높였던 아파트를 웃돈을 주고 사는 그에게 이제 세속의 성공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가 각성을 한다. 한 순댓국밥집 아주머니가 매몰차게 소금을 뿌리며 그에게 이렇게 외친다.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아, 이 썩을 놈아”라고.
이 이야기 구조는 어딘가 낯익다. ‘변호인’의 플롯은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이 분석한 영웅 신화의 구조와 정확히 일치하는 구석이 있다. 영웅은 각성하고, 시대적 소명을 깨닫고, 변모하고, 사회를 바꾸고 (혹은 바꾸려 들고), 고향에서 환대받지 못하고, 죽고, 다른 의미를 가지고 새롭게 부활한다.
그러나 ‘1000만 관객’ 동원에 이러한 관성만이 주효한 것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은 사람도 이 영화가 불편하지 않은 건, ‘위태로운 정의’라는 주제가 함께 버무려져 있어서다. 이는 2010년부터 우리 영화계를 관통하는 주제다. 장르적으로 보자면, 1990년대까지 한국 영화계를 휩쓸었던 멜로, 즉 ‘슬픔의 시대’가 가고 2010년에는 ‘분노의 시대’가 도래한 현상과 공명한다. 이 영화들은 사회적 모순과 폭력을 재현함으로써 모두 대중의 공분, 즉 분노를 일으킨다.
그러나 그 해결 방식과 제안은 모두 다르다. ‘부러진 화살’과 ‘도가니’는 실화를 강조함으로써 현실을 폭로하는 데서 멈춘다. ‘더 테러 라이브’는 그 분노의 책임을 언론에 전가하려 들지만 자멸적이다. ‘26년’은 대통령 암살이라는 판타지에 호소한다. ‘설국열차’는 계급의 문제를 탑재했지만, 우화와 은유의 연료로만 나아간다. 가장 빈번한 해결책은 ‘공정사회’ ‘돈 크라이 마미’ ‘더 파이브’에서 보여 주듯이 여성들이 사적 복수를 감행함으로써 범인을 개별적으로 응징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변호인’은 이 장르가 불러일으키는 대중의 공분을 아주 다르게 변주한다. 일단 고문도 불사하는 악질 경찰이나 현실에 영합하는 판사 같은 기득권층의 두께와 깊이를 겹겹이 보여 준다. 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절망과 분노만이 아닌 착한 사마리아인이란 일말의 희망, 가녀린 분노의 윤리학이 가미된다.
법에는 법으로, 권력에는 국민의 힘으로. ‘변호인’은 중장년 세대에게는 ‘우리는 야만의 시대를 함께했다’는 연대의 힘을, 20대 청년들에게는 현 사회의 모순이 시스템 안에서 일시적으로나마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의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곤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힘 있게 외친다.
▼ “변호인 난 이렇게 봤다” ▼
―네이버와 트위터 게시글
“실화가 아니었다고 해도 충분히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 노무현 이야기가 아니었다고 해도 충분히 가슴 아픈 이야기, 과거의 이야기라고 해도 충분히 현재 공감되는 이야기.”(점소이)
“정치를 영화로 배우는 ×들을 위한 선동 영화”(원기충전)
“내 정치사상은 우파 쪽에 가깝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노력을 아름답게 표현한 건 일품. 과연 지금의 데모는 그 정당성이 있는 것일까?”(sky1)
“‘7번방의 선물’도 천만 찍는데 이거라고 못 찍으란 법 없지. 한국영화 천만 수준.”(신소피스트)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