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즈음에/김열규 지음/256쪽·1만5000원·휴머니스트한국학 거장 김열규 유고집
평생 60여 권의 저서를 내며 활발한 집필 활동을 해 온 고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 ’아흔 즈음에’는 그의 집필 이력의 소박한 마침표다. 네이버 제공
그는 어려서부터 병약했다. 병 앓기가 곧 살기였다. 겨울부터 봄까지 알레르기와 코감기 목감기를 달고 살았다, 십이지장궤양을 알아 한때 몸무게가 50kg 아래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가 예순을 1년 앞두고 29년간 재직한 서강대를 떠나 고향 경남 고성군으로 간 것도 “따뜻한 곳에서 살라”는 의사의 권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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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얻은 그는 여생이란 말과 정면으로 맞선다. ‘여(餘)’라는 말은 남은 것, 쓸데없는 것이라는 뜻인데, 이 말은 틀렸다고 부정한다. 그는 “여생이 서글프고 애달픈 한편으로 은은한 여광의 빛살로 고여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남겨진 것이기에 더 귀하고 소중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드러낸다.
하지만 노년의 숙명인 고독을 비켜 가지는 못했다. 저자는 “외로움에 젖어서는 마음이 풀기 가신 갈잎 꼴로 버석댈 때”는 산책으로 마음을 달랬다. 걸음을 따라 지나간 일, 깜빡한 일, 삭이다 만 일들이 나근나근 되살아났다.
아흔 즈음의 저자에게 독자가 기대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그의 대처법일 것이다. 그는 “죽음이 천대받고 있다”고 말한다. “아니 학대에 시달리기도 하는 게 죽음이다. ‘죽여 버릴까?’ ‘죽어도 싼 놈’ 같은 말이 흔하다. (중략) 죽음을 삶의 반대로 삼지 않고 부정하지도 않은 채, 삶과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으로서 받아들이기에 마땅한 나이를, 나는 지금 누리고 있다.”
일생을 ‘책벌레’로 불려 온 저자는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했다. 2008년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머리 고픔은 책 예술 자연을 통해서만 채울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자연으로 돌아갈 날을 예감한 듯 책에는 글보다는 자연에 대한 사랑이 깊다. 자연을 닮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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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원고를 마무리할 즈음 발병한 혈액암 때문에 입원해서도 그는 딸(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항암 치료 때문에 백발의 머리카락 몇 가닥만 남은 아버지에게 딸은 “보름달같이 밝은 화색이 돌아 별 노력 없이 고승처럼 보인다”고 했다. 아버지는 껄껄 웃었다.
쉽게 읽히지만 서평을 쓰기 어려운 책을 덮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쉰 즈음도 안 된 기자가 저자의 머릿속을 오롯이 전할 수 있을까? ‘서른 즈음에’란 노래 가사처럼 ‘즈음에’란 말은 아련하고도 성숙하다. 생은 즈음에를 마디로 조금씩 커 간다는 건 알 것 같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