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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사형장에서 싹 튼 日근대의학… 난학이 꽃피기까지

입력 | 2013-10-26 03:00:00

◇일본 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
이종각 지음/280쪽·1만2900원/서해문집




일본 도쿄 시내에는 에코인(回向院)이란 작은 절이 있다. 도쿠가와 막부시대(1603∼1868)에 이곳에는 사형장이 있었다. 1651년 문을 열어 1868년 메이지 유신 직후 폐지될 때까지 이곳에서 20여 만 명이 처형됐다. 현재 이곳에는 구천을 떠도는 영혼을 저세상으로 인도한다는 지장보살상이 서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수많은 생명이 끊긴 이곳에서 일본 근대 의학이 싹텄다. 1771년 봄 형장에서는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1733∼1817) 등 여러 의사가 일본 최초로 인체 해부를 참관했다. 형장에서 일하는 천민이 50대 여성의 배를 갈라 장기를 꺼냈다. 이를 통해 중국 의서에 실린 인체도는 실제와 다른 반면, 네덜란드 인체 해부도는 실제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의사들은 네덜란드 해부서 ‘타펠 아나토미아’를 일본어로 번역하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네덜란드 인사말만 알던 의사들이 번역을 하겠다는 것은 무모하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당시 일본에는 조잡한 필사본 네덜란드-일본어 단어장 몇 개가 있을 뿐이었다.

스기타는 뜻을 같이하는 의사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澤·1723∼1803) 등과 무모한 도전을 시작했다. 명사는 형태가 확실한 인체 조직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아 어렵지 않았지만, 부사와 형용사가 문제였다. 일본어에는 없는 관계대명사도 발목을 잡았다. 이들은 나가사키에서 구해 온 프랑스-네덜란드어 사전을 이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3년 반 만에 번역을 마쳤다.

이렇게 95장 분량인 일본 최초의 서양 의학 번역서 ‘해체신서(解體新書)’가 1774년 탄생했다. ‘해체신서’ 출간 이후 의학뿐 아니라 서양의 천문 지리 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이 일본어로 번역됐다. 이 과정을 주도한 스기타는 ‘난학(蘭學)의 선구자’ ‘근대 의학의 개척자’로 불렸다. 네덜란드(화란·和蘭) 학문이란 뜻의 난학이 서양 학문을 뜻하는 말이 된 것도 ‘해체신서’ 때문이다.

스기타의 회고록을 기반으로 쓴 책은 소설처럼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스기타는 이후 의사로 일하며 난학을 가르치는 사숙(私塾)인 난학주쿠를 열고 부와 명예를 얻은 반면, 번역에 결정적 공헌을 한 마에노는 곤궁한 삶을 산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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