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덕수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수많은 법령 가운데 보통 사람의 생활과 가장 가까운 것은 민법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재산적, 가족적 생활 전부가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토씨와 극소수의 한글 용어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자일뿐더러 띄어쓰기조차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민법만 보면 마치 우리글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현재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에서 검색되는 민법은 편의상 임시로 한자를 한글로 바꾸고 띄어쓰기를 해 놓은 것으로 정식 민법은 아니다.
현행 민법에는 ‘溝渠(구거)‘ ‘堰(언)’과 같은 어려운 한자뿐만 아니라 ‘要役地(요역지)’ ‘承役地(승역지)’처럼 전문가도 알기 어려운 용어들이 태반이다. 거론한 용어들은 각각 ‘도랑’ ‘둑’ ‘편익을 받는 토지’ ‘편익을 위하여 제공되는 토지’ 등 알기 쉽게 바꿔야 한다.
우리 민법은 일제강점기 일본 민법의 영향을 크게 받아 제각(除却)하다(제거하다), 해태(懈怠)하다(게을리하다) 등 아직도 곳곳에 일본어 투의 표현이 즐비하다. 민법의 문장은 모든 법령 문장, 나아가 국민 언어생활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민법은 오랜 세월을 두고 검증된 내용을 정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법이기 때문에, 다른 법령을 만들거나 법률 전문가가 법률 문장을 작성할 때 민법의 표현을 따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제 한글세대가 우리 사회의 주도층으로 등장하는 날이 머지않았다. 민법에는 ‘催告(최고)’라는 용어가 중요 개념으로 자주 나오는데, 그것은 대부분 일정한 행위를 촉구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한자에 익숙한 중장년 세대는 이 용어의 뜻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을지 모르나, 한글세대는 그 뜻을 짐작하기는커녕 읽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그것을 단순히 한글화만 하면 가장 높다는 뜻의 ‘최고(最高)’와 혼동할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위의 ‘催告’는 어렵지 않은 표현인 ‘촉구’ 등으로 고쳐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쉬운 민법’은 우리 법률 문화를 국민 중심으로 한 단계 높이는 일이다. 민법은 지금까지는 법률 전문가 입장에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570년 전에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으로 일반 백성들에게 글을 읽고 깨치게 하여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한 것처럼, ‘민법 알기 쉽게 새로 쓰기’를 통해 그동안 법률 전문가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민법을 일반 국민에게 돌려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송덕수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